크라머르 전력질주하고 있을 때 승훈은 이미 웃고 있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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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훈 우승 순간

네덜란드 선수 한바퀴 추월

오렌지 관중도 기립박수



“주변 귀띔에 종료전 金 예감

어부지리 같지만 짜릿

다음엔 제대로 붙고 싶어

김연아 성시백도 金 따기를”

살짝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올림픽 신기록도, 크라머르의 실격도 모두 기적 같은 일이에요.”

스피드스케이팅 이승훈(22·한국체대)이 남자 5000m 은메달에 이어 24일 열린 1만 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스벤 크라머르(네덜란드)가 레이스 중 잘못된 코스로 가는 바람에 실격되며 은색이 될 뻔한 이승훈의 메달 색깔은 황금색으로 변했다. 크라머르는 이승훈보다 4.05초 빨리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쓸쓸히 짐을 쌌다.

이승훈은 “솔직히 어부지리 금메달 같지만 기분은 매우 좋다. 다음에 크라머르와 제대로 붙어서 꼭 이기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은메달에서 금메달로 바뀐 순간 그는 코칭스태프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는 “짜릿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2위였다가 금메달로 바뀌는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꽃다발 세리머니를 할 때 은, 동메달 선수가 가마를 태워줬다. 굉장한 영광이었다. 이 선수들이 아시아 선수로서 처음 금메달을 따낸 나를 대우해 준다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이승훈은 이미 크라머르가 결승선을 통과하기 전에 금메달을 예감했다.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크라머르가 실수한 것 같다’고 말해주셨다”고 말했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장거리 종목은 유럽 선수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이승훈은 아시아 선수 첫 은메달에 이어 금메달까지 움켜쥐었다. 그 비결에 대해 그는 “유럽 선수들은 크지만 그만큼 무거워서 체력 소모가 많다. 나는 키가 작지만 가벼워 적은 힘으로 레이스를 펼칠 수 있다. 체격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유럽 선수들은 다리가 길어 따라가기 쉽지 않다. 나는 체력 부담이 되지만 자세를 많이 낮춰야 한다. 체력을 기르려고 지구력 훈련에 열중했다”고 덧붙였다. 모태범(21·한국체대)과 이상화(21·한국체대)의 선전도 그에게 자극이 됐다.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그는 지난 인터뷰 때는 쇼트트랙에도 다시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는 “쇼트트랙을 병행하고 싶지만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에는 스피드스케이팅으로 계속 도전하고 싶다”며 스피드스케이팅에 집중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는 자신의 금메달과 동료들의 메달 행진이 즐겁기만 하다. 그는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역사상 이렇게 많은 메달이 나온 적이 없었다. 선수들도 모두 놀랄 정도다. 선수촌에서도 앞방이 쇼트트랙 선수들인데 마주칠 때마다 축하한다고 얘기해 줬고 잘하라고 서로 격려해 주고 있다. 이번 올림픽에서 김연아는 물론 성시백 선수(용인시청)도 금메달을 따길 바란다. 한국 빙상이 모두 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올림픽 뒤 하고 싶은 일도 밝혔다. 계획은 소박하면서도 특이했다.

“서울 거리를 활보하고 싶어요. 사인 공세를 받으면 즐거울 것 같아요, 하하.”

밴쿠버=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 다시보기 = 빙속 이승훈, 1만m 금메달…올림픽 신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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