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피플] 롯데 임경완 “뒷문, 불러만 다오!”

  • 입력 2009년 8월 26일 09시 23분


롯데 임경완(34)네 중국식당(부산 남천동 영빈관) 짬뽕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다. 주장 조성환을 비롯한 롯데 사람들의 이구동성이다.

임경완은 어머님이 꾸려가는 이 집 짬뽕, 자장면, 탕수육 등을 중학교 때부터 먹었다. 그렇다고 임춘애처럼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는 ‘짠한’ 스토리는 아니다. 오히려 영빈관 짬뽕은 임경완이 야구를 해서 탄생할 수 있었다.

○야구명문 경남중 진학… 천하진미 짬뽕 탄생!

부산 소년 임경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 몸이 워낙 약해서였다. 야구에 딱히 재미도 못 느꼈고, 직업선수가 되리라곤 언감생심이었다. 심지어 롯데 팬조차 아니었다. MBC청룡을 어렴풋이 좋아했는데 유니폼이 멋있어 보여서였다. 동경하는 선수도 없었다.

별로 소질도 없어 보였고, 고교까지 쉬었다 말다하는 식으로 띄엄띄엄 야구를 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좋아한 것도 아니어서 다시 야구로 돌아왔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초등학교 선배인 진갑용(삼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처음엔 외야수로 시작했다가 투수가 됐다. 사이드암이 된 이유도 운명 같은 우연이다. 야구를 가르쳐준 학교 선생님이 사이드암 출신이어서 그렇게 됐다.

어쨌든 허약한 아들이 야구를 시작하자 부모님은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외아들이 중학교를 야구명문 경남중으로 진학하자 학교 근처로 가족이 이사했다. 손맛 좋은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중국식당을 연 것이다. 임경완에게 중국음식은 ‘보양식’이었던 셈. 그 덕분에 이 맛을 부산 사람들 누구나 즐기게 됐고.

○무작정 인천 상륙…주성로 감독 만나 전국 평정

경남고를 졸업했지만 그다지 두각을 못 드러낸 임경완은 인하대로 진학했다. 인천까지 상경한 이유는 하나, “부산 밖을 경험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 그저 그랬던 그의 야구인생 궤적이 일변한다. 역시 사이드암 투수 출신인 주성로 감독을 만났고, 대학 3학년 때부터 야구에 재미를 붙였다. 후배 서재응(KIA)과 원투펀치를 이뤄 전국무대를 평정하다시피 했다. 롯데뿐 아니라 인천 연고였던 현대까지도 러브콜을 보내왔다.

이러던 중 김용희 당시 롯데 감독이 직접 동대문구장을 찾아왔다. 김 감독은 1차지명을 시사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와 손인호가 롯데의 1998년 1차지명을 놓고 의식하던 시기였다.

계약금은 2억원이었는데 억울한(?) 사연이 숨어있다. 하필 IMF사태 직후여서 롯데는 동계훈련조차 마산에서 치른 실정이었다. 그래도 버텼는데 조인성의 LG 입단 계약금(4억2000만원), 박경완이 쌍방울에서 현대로 팔려갈 때 이적료(9억원) 등을 생각하면 더 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작동했던 것. 그러나 삼성의 1차지명을 받은 강동우(한화)가 1억6000만원‘밖에’ 못 받은 것을 보고 욕심을 꺾었다. 롯데는 예기치 않게 강동우의 덕을 본 셈이다.

그러나 1998년 개막전이자 프로 데뷔전(쌍방울전)에서 만루홈런을 맞았다. “마운드에 서있는 것이 무섭냐?”란 질책과 함께 2군에 떨어졌다. 팔꿈치도 아팠다. 2001년 첫 승을 할 때까지 근 3년을 재활에 바쳤다. 어쩐지 수술을 받으면 다신 야구를 못할 것 같았다. 당시 재활 동기가 손민한, 차명주 등이었다. 임경완은 “먹튀 재활소”라고 웃었다. 그러면서 “손민한이 없었으면 그 시절을 견뎠을까 싶다”고 회고했다.

○전성기 뒤로한채 군입대…운명처럼 따라온 야구

백인천 감독이 부임한 뒤 임경완은 ‘하드 트레이닝’을 받았다. 같은 사이드암인 노상수 박동수 투수코치가 도운 것도 행운이었다. 캠프에서 4000개를 던졌다. 팔이 단련됐고, 컨트롤이 잡히자 자신감도 생겼다. 2003년 3승14패11세이브를 거뒀고, 2004년 양상문 감독 취임과 맞춰 몬스터 시즌이 왔다. 105.1이닝 투구에 4승6패5세이브 22홀드. 홀드는 전체 1위였다. 그러나 시즌 직후 군대에 가느라 시상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29세에 간 군대. 5년 열애 끝에 2002년 결혼한 뒤 얻은 첫 아들(정형 군)은 당시 갓 돌이었다.

5주 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춘천에 배치됐는데 또 한번 야구가 그를 따라왔다. 임경완이 유명한 야구선수란 사실을 인지한 부대 측이 부서 이동에 도움을 줬고, 부산진경찰서 의경으로 옮길 수 있었다. 롯데 팬 일색인 거기서 임경완의 군 생활은 더 야구에 충실해졌다. “사실 군대에 갈 무렵 팔이 올라가지도 않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재충전의 시간이 됐다”고 그는 떠올렸다.

○2군→패전용→승리불펜…프로는 실력으로 말한다

복귀 시즌인 2007년을 준수하게 마친 뒤,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했다. 가고시마 캠프 경쟁을 거쳐서 마무리로 낙점 받았다. 그의 싱커와 땅볼 유도능력을 높이 샀다는 전언. 그런데 막상 시즌에 돌입하자 일이 꼬였다. 시즌 초 롯데가 승승장구해서 그의 블론세이브는 더욱 부각됐다. “심적 부담감이 상당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 던져도 중간으로 나오면 ‘내 뒤에 누가 있다’란 안도감이 있는데 마무리는 그렇지 않았다. KIA 한기주도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눈여겨볼 사실은 2008년 임경완의 데이터가 딱히 나쁘지 않았단 대목. 피홈런은 단 2개뿐이었고, 피안타나 탈삼진 비율도 대동소이했다. 땅볼을 유도해도 그 타구 방향, 혹은 내야수의 수비능력에 따라 희비가 좌우되는 싱커볼러의 운명이 불운한 쪽으로 작용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중압감이 쌓이다보니 볼넷이 늘어난 현상도 설명할 수 있다.

한때 “My closer”라고 공언했던 로이스터는 후반기 무렵부터 패전 처리로 쓰임새를 낮췄다. 현실을 받아들였고, 이 악물고 작년 캠프를 치렀지만 초반 2군행 통보를 받았을 땐 정말 낙담했다. “불러주면 어떤 상황이라도 무조건 던지겠다”란 말을 감독에게 꼭 전달해달라는 각오를 남기고 2군에 갔다.

이후 임경완의 ‘재기’는 숫자에 찍힌 그대로다. 로이스터는 패전 처리에서 출발한 그를 이제 이정훈과 더불어 가장 믿는 승리 조 불펜으로 중용한다. 최근 앞서던 5회 KIA 김상현 타석에서 에이스 송승준을 교체할 때, “다음은 임경완이다. 무실점은 내가 보증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확고해졌다.

임경완이 입단한 뒤 롯데는 포스트시즌에 두 번 나갔다. 1999년은 아파서, 2008년은 못해서 엔트리에 끼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올 시즌 롯데의 가을잔치는 그에게 더 간절한 듯했다. 한국시리즈 우승, 투수 골든글러브는 그 다음 꿈이다. 허무맹랑하다고? 임경완이 야구를 시작했을 때, 여기까지 올라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직 |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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