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WBC 스펙트럼]‘일지매’ 이용규 베이스를 훔쳐라

  • 입력 2009년 3월 18일 07시 53분


이용규는 참 당찬 선수라고 느껴집니다.

타석에 서면 좀처럼 물러나지 않고, 누상에 나가면 끊임없이 상대수비를 교란하고, 글러브를 들고 나가면 악착같이 공을 걷어냅니다.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 ‘야구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는 듯 그는 그라운드에 혼을 던집니다.

상대에게 위압감을 줄 수 없는 왜소한 체격이지만 그는 하늘이 선물해 준 유일한 무기인 빠른 발을 밑천 삼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야구선수가 됐습니다.

단점을 극복하고 태극마크를 달기까지 그가 쏟은 땀과 눈물의 양이 얼마나 될지는 어렴풋이나마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이번 WBC에서 벤치에서 쉬는 날이 많았던 그는 16일(한국시간) 멕시코전에서 마침내 선발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오랜 만에 찾아온 기회, 더군다나 4강진출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첫판. 긴장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는 훈련을 마치고 덕아웃에 들어오면서 웃습니다. “저는 훈련할 때는 굉장히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고 그라운드에 막상 나가면 전혀 긴장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는 플레이볼이 선언되자 그라운드를 휘저으며 멕시코의 단단한 옹벽에 하나둘씩 틈새를 갈라나갔습니다. 마치 처마와 처마 사이를 번개처럼 오가는 일지매(一枝梅)처럼.

0-2로 끌려가던 2회, 이범호의 솔로홈런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좌전안타를 치고 나갔습니다.

롯데에서 활약하는 가르시아의 귀띔이 있었을까요. 멕시코 선발 올리버 페레스는 다음타자 박경완에게 던지는 공만큼이나 1루에 견제구를 뿌리더군요.

그러나 날래기가 귀신같은 일지매는 한박자 늦춘 ‘딜레이드 스틸’로 2루를 훔쳤습니다. 허를 찔린 메이저리그 포수 로드 바라하스가 허둥대는 모습은 왜 그리 짜릿한지.

그는 이날 타석에서도, 그동안 덕아웃에서 숨죽이며 갈아왔던 비장의 칼을 빼들고 긴요할 때마다 전광석화처럼 휘둘렀습니다.

4회 중전안타, 6회 희생번트, 8회 희생플라이. 때를 못 만났던 검객에게 멕시코전은 그야말로 한풀이 무대였습니다.

한국은 18일 물러설 수 없는 일본과의 3번째 맞대결을 펼칩니다.

우리는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준결승 일본전에서 승리를 결정하는 마지막 타구를 잡고서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이용규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걸리면 베겠다’는 정신으로 무장한 ‘사무라이 JAPAN’에 맞서 ‘한국산 왼손검객’ 이용규가 다시 한번 매화가지 하나를 일본 덕아웃에 던져두고 유유히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신출귀몰한 일지매처럼.

샌디에이고(미 캘리포니아주)|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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