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현 기자가 간다] K리그 시상식 경호원 체험기

  • 입력 2008년 12월 17일 09시 07분


행사 통제 5시간…내 심신은 통제 불능!

갑작스레 주어진 경호원 체험. 할리우드 영화 ‘보디가드’에서 휘트니 휴스턴을 경호하는 케빈 코스트너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솔직히 이 모습이 정말 낯설었다.

대학 졸업식 이후 처음 걸쳐본 정장 차림이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문상을 갈 때나 결혼식에 참석할 때도 평상복 차림으로 다녀왔지, 양복을 입은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제 멋대로 불어난 몸에 억지로 와이셔츠를 맞추고, 다림질하고, 검은색 구두에 물광(군시절 경험으로 볼 때 물보다는 침이 훨씬 효과적이다!)을 내본 것도 꼭 3년 만이었다.

○얄팍한 계산, 불길한 예감

수화기를 통해 전해진 흔쾌한 대답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축구 종목을 담당하며 낯익은 TRI 인터내셔널 김성태 대표이사와 연락이 닿자마자 “언제든 오시라”는 답이 나왔다.

두 번째 수순은 경호 체험 분야를 정하는 일. 당초 유명 가수의 연말 공연이나 프로야구 골든 글러브 시상식까지 고려했지만 결국 9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셜 아트센터에서 열린 2008 프로축구 K리그 대상 시상식 행사 경호를 택하게 됐다.

이제야 털어놓는 데 솔직히 일거양득 효과를 노린 것도 사실이다. 경호 체험을 하는 바람에 행사 취재를 선배들이 담당해야 했고, 어쩌면 평소보다 일찍 퇴근할 수도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물론, 이 얄팍한 생각이 딱 6시간 만에 무너지긴 했지만….

시상식 시작은 오후 2시. 두 시간 전 행사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TRI에서 파견된 20여명 경호 인력은 곳곳에 배치돼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어떻게 나오셨죠?” 식장 입구에 있던 한 요원의 제지를 받던 찰나,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은 임용범 TRI 실장이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한다. “만만치 않은 일인데, 잘 하실 수 있겠죠. 우선 옷부터 갈아입고 오세요.”

복장을 포함해 하나씩 점검받는데, 임 실장의 지적이 쏟아진다. “단추 하나짜리 정장은 캐주얼 차림이기 때문에 지양하고, 불량한 태도는 피해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은 삼가고 몸에 손을 대서도 안됩니다. 늘 상냥한 태도와 웃음을 짓고 있어야 해요. 특히, 짝다리로 서 계시면 안된답니다. 항상 단정하게 손을 모으고, 발도 ‘11자’를 만드세요. 허리도 꼿꼿이 세워주고요. 자, 지금부터 경호원 모드로 들어가는 겁니다.”

○기자가 기자를 통제한다고?

임 실장이 직접 배치해준 곳은 TV 중계용 카메라가 설치돼 있는 행사장 1층 맨 뒤의 포토존. 이에 앞서 주차장 입구에서 VIP 및 팬 안내를 맡기도 했지만 20여 분에 불과해 체험이라고 할 수 조차 없었다. 더욱이 알고 지내던 구단 관계자들이 꾸준히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잠시나마 ‘경호원’ 아닌 ‘기자’ 신분으로 돌아가곤 했다.

행사가 시작되자 임 실장은 포토존 왼쪽 끝에서 생중계를 방해하며 이곳저곳 들락거리는 취재진을 한 번 통제해 보란다. 익숙한 업무를 담당해보라는 나름의 배려일 수도 있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스스로도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통제를 싫어하는 집단을 맡고 있으려니 아는 얼굴들이 악수를 청하고, 어깨를 툭 치며 “뭐하냐?”란 한마디와 함께 아무렇지 않게 지나친다. ‘어, 이게 아닌데’란 생각에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모두 착석해 주시고, 중계가 시작되면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라고 외쳐댔지만 별 효력은 없었다.

오프닝 행사가 막 시작될 무렵, 시간을 맞추지 못한 한 방송사 중계팀이 헐레벌떡 도착했다. 그런데, 카메라 기자와 보조 요원이 포토존 외부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카메라를 올려놓으려 했다.

“이곳에 카메라를 설치하면 통로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겪게 됩니다. 다른 곳에 설치해주세요.” 따지듯이 돌아온 황당한 대답.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이곳에 카메라가 설치된다고 크게 피해줄 것은 없는데요. 어디서 지시받으셨죠?”

그들의 막무가내식 태도에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임 실장의 말대로 다시 한번 정중하게 카메라를 다른 쪽에 설치할 것을 요청했다. 다행히 중계팀이 다른 지역으로 카메라를 옮기며 사태는 잘 해결됐으나 마음 한구석에 남는 찜찜함은 감추기 어려웠다. 행사에 앞서 얘기를 나눈 TRI의 한 요원이 푸념하며 내뱉은 “솔직히 취재진의 동선을 제한하고, 막는 게 관중 통제보다 힘들다”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뒷정리까지 최선을…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욕을 먹어가면서 어렵사리 취재진의 움직임을 막고 있는 데,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말썽이 났다. 좌석에 앉아 행사를 지켜봐야 할 관객들이 끊임없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머리를 낮춰주세요.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줄여주세요”라고 수 차례 읍소해도 반응이 없다.

심지어 평소 안면이 없던 한 초청인사는 버젓이 일어서서 카메라 앞을 지나쳤다. 잠시 임 실장의 경고를 잊고, 막아선 뒤 제지하기 위해 뻗은 팔이 그의 몸에 닿고 말았다. 순간, 아래 위를 흘겨보는 그 인사의 표정과 거만한 태도가 또다시 성질을 돋웠다. 곧바로 머리를 숙이며 사죄의 뜻을 전했지만 그의 불쾌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어디까지나 이 순간은 경호원인 것을…. 그저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던 임 실장의 따스한 미소가 아니었다면 한 판 싸움이 붙었을 지도 모르겠다.

젊은 나이에 창피하지만 한 번도 앉지 못한 채 5시간 째 서 있으려니 다리가 저리고, 허리와 몸 구석구석 관절이 아파온다.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해 배까지 ‘꼬르륵’거린다. 그래도 마무리까지 충실해야 했다.

시상식이 끝난 후에는 인터뷰실 앞을 지켜냈다.다행히 불상사는 없었다. 신분증 없이 오가는 몇몇 지인들을 그냥 들여보내준 것 외에는 특별히 문제될 일도 없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취재진 신분이었다. 부디, 이 점만큼은 양해해 주시길….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사진=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화보]남장현 기자가 간다… 경호원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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