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 박태환을 키운 건 ‘큰물’

  • 입력 2007년 3월 30일 02시 59분


《박태환(18·경기고)이 처음 국제무대에 선을 보인 것은 2004년 8월 14일 아테네 올림픽 자유형 남자 400m 예선.

당시 15세 소년 박태환은 플랫폼에 서서 스타트 자세를 취하다 그대로 풀에 떨어져 팔 한번 휘저어 보지 못하고 보따리를 싸야 했다.

그로부터 불과 2년 7개월여.

박태환은 세계 173개국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두 참가한 제12회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다관왕을 노리는 월드 스타로 발돋움했다.》

○역대 한국선수 중 국제대회 출전 가장 많아

어떻게 이런 급성장이 가능했을까. 박태환의 폐활량(7000cc)은 일반 성인(4000cc)의 거의 2배에 이르고 그가 부력과 유연성을 타고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하지만 옥석도 다듬어야 비로소 보석이 되는 법.

박태환이 단기간에 세계무대를 제패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역대 한국 수영선수 가운데 국제대회 경험이 가장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한수영연맹은 2003년부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한국이 어떻게 경영에서 금메달을 따내느냐”며 비웃기까지 했지만 연맹은 어리고 재능 있는 선수들을 과감히 국가대표로 뽑았고 국제대회의 국내 유치에도 힘을 모았다.

이 덕분에 박태환은 2004년 자유형에서 한국 기록을 한 개도 보유하지 못했지만 가능성 하나로 권유리(당시 아주중) 등과 함께 중학교 3학년의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로 뽑혔다.

○세계적 스타들과 경쟁 경험 쌓으며 성장

수영연맹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7, 8개국을 돌며 시리즈로 펼쳐지는 세계쇼트코스(25m 풀) 수영선수권대회를 유치하며 대표 선수들을 내보냈고 박태환도 이 대회를 통해 국제 경기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수영연맹은 박태환이 2004년 11월 멜버른대회 자유형 1500m에서 은메달을 따내자 그를 시리즈 전 경기에 출전시켰다. 다른 선수들을 한국 대회(대전)와 외국 대회 중 1곳씩만 출전시킨 것에 비하면 대단한 특혜를 베푼 것이다.

박태환은 외국의 유명 선수들과 겨룰 기회가 많아지면서 초조함과 불안감을 떨쳐 버리고 대담성을 키워 나갔다.

박태환을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한 김봉조(60) 전 대표팀 감독은 “태환이가 처음에는 선수대기실에 앉아서 온몸을 벌벌 떨며 긴장하더니 1년이 지나니까 헤드폰을 끼고 편안하게 즐기더라”고 말했다.

○아테네 올림픽 실격 3년도 안돼 월드스타로

박태환이 계속 발전만 해 온 것은 아니다. 2005년 11월 2일 마카오 동아시아대회 자유형 1500m 결선에서 그는 줄곧 선두를 달렸지만 터치판을 세게 두드리지 않아 0.05초차로 중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내줘야 했다.

“너무 방심했던 거죠. 그 일이 있고 나서 반성 많이 했습니다.”

박태환은 아테네 올림픽과 동아시아경기 이야기를 꺼내면 지금도 창피해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나 그는 실수를 자기 발전을 위한 경험으로 이용할 줄 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실수한 뒤에 스타트 연습을 맹렬히 해 지금은 평균 출발 반응 시간이 0.66초로 경쟁자들(0.7∼0.8초)에 비해 훨씬 빠르다. 마지막 터치판 두드리는 것 역시 패드가 깨져 나갈 듯하다.

멜버른=전 창 기자 j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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