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중 다니며 시집 펴낸 팔순 할머니 “황혼길 아름답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0일 11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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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2023 학생 교원 저자되기 프로젝트 출간기념회’에 참석한 김유임 할머니. 김영숙 교사 제공
지난달 20일 전남 순천시 조례동에 있는 한 호텔에서는 조촐하지만 뜻깊은 출간기념회가 열렸다. 전남도교육청이 주관한 ‘2023 저자되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과 교원들이 자신들이 펴낸 책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저자되기 프로젝트는 교육활동 속에서 이뤄진 글쓰기 우수작품을 책으로 펴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학생과 교원 작가들은 시, 소설, 그림책 등의 주제를 선정하고 표지 디자인까지 직접 제작했다. 3개월간의 초고와 퇴고 작업을 마치고 펴낸 책을 들고 이날 독자와 만났다. 출간기념회장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학생이 있었다. 목포중앙여중 부설 방송통신중 3학년 김유임 할머니(82)였다.

할머니는 그동안 쓴 시 112편을 모아 ‘노을길 행복시’란 제목의 시집을 펴냈다. 시집은 ‘팔순 중학생 할머니의 행복시’라는 부제가 달렸다.

“산동네 낮은 지붕 희미한 전등불/오손도손 도란도란 이야기 속 웃음꽃/딸그락딸그락 늦은 저녁/연탄불 구들장에 뜨끈한 아랫목/할머니의 옛날얘기 밤새는 줄 모르고/고구마에 동치미 국물 그 시절 그리워/퇴근길 늦은 가장 손에 고등어 한 손/새끼줄에 대롱대롱 한 손에 과자봉지….”(산동네 저녁)

김유임 할머니가 펴낸 시집 ‘노을길 행복시’. 시집에는 112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전남도교육청 제공
할머니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에 감동하고, 깊이 있게 관찰하고, 인상 깊은 풍경은 카메라에 담아 시로 표현했다. 오래된 연륜과 지혜를 시로 풀어내 청국장처럼 구수하고 진한 감동이 느껴진다.

할머니를 늦깎이 시인의 길로 이끌어 준 이는 목포중앙여중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김영숙 교사(62·여)다. 할머니에게 김 교사와의 만남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큰 행운이었다. 60년 가까이 살아온 남편을 떠나보내고 마음 둘 곳이 없었던 할머니는 운명처럼 김 교사를 만났다. 자식들의 권유로 팔순을 앞둔 나이에 방송중에 입학한 것이다. 방송중은 중학교 학력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마련키 위한 3년 교육과정이다. 한 달에 두 번 주말에 출석 수업이 있고 평일에는 온라인 수업을 한다. 어려웠던 시절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르신들이 공부에 대한 한을 풀고 만학의 열정을 쏟아내는 곳이다.

서예가 취미였던 할머니는 2021년 입학하자마자 글쓰기 동아리에 들어갔다. 동아리에서 60, 70대 할머니들과 함께 시를 배웠다. 할머니는 동아리를 지도하는 김 교사에게 “시는 어떻게 쓰냐”고 물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살아오신 삶이 곧 훌륭한 시입니다. 진솔하게 쓰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들은 할머니는 그때부터 시를 일기처럼 썼다고 한다. 그동안 가슴에, 입안에 가둬둔 말들이 술술 시가 되어 나왔다.

“서산으로 해가 넘어갈 때 땅거미 지고/저 멀리 산기슭 마을에 하나둘 가로등 불이 켜지고/ 이집 저집 창문에 비친 백열등 빛이 곱다/저녁 먹느라 숟가락 소리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 정겨운데/어둠이 내리는 길에 갈 곳 없는 나그네/긴 철길 따라 불빛 세워가며 무거운 발길 걷다 보니/조그만 간이역 희미한 전등불만 졸고 있다.”

할머니가 쓴 시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석양 나그네’다. 할머니는 이 시로 지난해 9월 전국 방송중 학예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2023 학생 교원 저자되기 프로젝트 출간기념회’에서 김영숙 교사(오른쪽)가 김유임 할머니의 시 낭송을 듣고 있다. 김영숙 교사 제공
“할머니의 시는 유머가 있고 지역의 옛 풍경이 살아있고 그 시대 삶에 대한 감동과 그리움이 스며있어요.” 김 교사는 “할머니는 동아리 인터넷 카페에 일상에서 건져낸 감성 시 190여 편을 올릴 정도로 열정이 가득한 분”이라며 “사제 간의 아름다운 동행 덕분에 정년까지 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시집 마지막 페이지에 올 8월 교단을 떠나는 김 교사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내 생전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나의 황혼길을 아름답고 보람있게 도와주셔서….”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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