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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부정(否定)’이 더 힘세다[고양이 눈썹No.47]

입력 2022-12-03 16:00업데이트 2022-12-0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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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2019년 1월


▽이순신 : “되겠느냐!”
나대용 : (머뭇거리며) “그러다 다 죽습니다!”
이순신 : (단호하게) “된다고 말하게!”
나대용 : (결심한 듯) “예! 해보겠습니다!”
- 영화 ‘명량’의 전투 장면 대사

영화 ‘명량’(2014년) 예고편 스틸컷영화 ‘명량’(2014년) 예고편 스틸컷


▽‘긍정의 힘’ ‘긍정 습관’ ‘자기 긍정감’ ‘긍정 사고’ ‘긍정의 코치 기술’ ‘매일매일 긍정하라’…. 시중에 나와 있는 ‘긍정’을 주제로 하는 자기계발서 제목들입니다.

일부 뇌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두뇌는 부정을 인식하지 못 한다고 합니다. 대표 사례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입니다. 스키선수들은 경기 전 마인드 컨트롤을 하거나 사전 연습을 할 때 기문(깃대)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문은 피해야 하는, 즉 부정의 대상이기 때문이죠. 부정을 의식하다보면 무의식적으로 긍정의 대상으로 착각해 부딪힐 가능성이 커진다고 합니다. 대신 지나야 할 ‘길’만을 응시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경기에서도 눈 위에 길의 굴곡을 파란색 페인트로 칠 해 놓습니다. 선수들이 코스를 벗어나는 사고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과연 긍정은 부정보다 더 좋은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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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예능 프로그램 ‘정글의 법칙’에서는 출연자들이 먹을 것을 스스로 해결합니다. 채집과 수렵이라는 원시적인 활동을 하는데요, 먹거리를 발견하면 먼저 ‘부정’부터 합니다. 먹으면 배탈이 나겠지? 먹을 수 있는 것인가? 잡으면 현지법을 어기는 것 아닌가? 등등. 현지 전문가가 ‘먹어도 된다’고 조언을 해 준 뒤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먹습니다. 선 부정, 후 긍정입니다.

자연에서의 생존은 긍정보다 부정이 유리합니다. 덮어놓고 먹다보면 큰 일 나지요. 옆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면 일단 도망치는 게 낫습니다. 긍정보다는 부정이 자연의 리듬에 더 맞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부정은 야만이나 본능의 어법이고, 긍정은 진일보한 문명의 언어일까요?

▽성경의 십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등 총 10개 계명 중 7개가 부정 명령입니다. ‘하라’ 보다 ‘하지마라’가 훨씬 많죠. 기독교는 순종과 긍정의 종교인데도 말이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한 문제지만, 만약 ‘긍정이 먼저인가, 부정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이 있다면 저는 부정이 먼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정은 힘이 셉니다. 어쩌면 우리는 부정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있는 지도 모릅니다. 태초의 습성이나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긍정을 하라는 가르침이 나오는 것이겠죠. 즉 부정을 부정하라는 것이죠.

‘지하경제’인 사채업계에는 ‘고객’이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합니다.

웃는 고객 vs 화를 내는 고객.

돈을 빌리러 와서는 연신 싱글벙글하고 이자에 대해 설명하면 ‘예예’하며 다 수긍하는 사람과, “이런 고금리가 말이 되느냐”며 항의하고 짜증을 내는 손님입니다. ‘예스맨’에게는 돈을 내주지 말라는 것이 저 업계의 불문율이라고 합니다. 웃으며 돈을 빌려가는 이유는 어차피 돈을 갚을 마음이 없기 때문이죠.

짜증을 내는 사람은 돈을 빌리면서 상환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는 증거라네요. 그러니 고금리에 분노하는 것이고요.

영화 ‘예스맨’(2008년) 포스터영화 ‘예스맨’(2008년) 포스터


▽사진기자로 일하면서도 사실 긍정할 때보다 부정할 때가 많습니다. 취재현장에선 보여주는 것보다 숨기려는 것을 찾아야 하니까요. 보이면 믿는 것이 사진기자의 직업병 중 하나인데요, 그 성향을 극복하고 사실을 통한 진실에 접근하려면 일단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려 애를 씁니다.

▽얘기를 할 때 그냥 흔히 버릇처럼 쓰는 말이 있죠. 영어로 ‘you know’, ‘well’. 일본인들은 ‘아노…’ 라는 말을 낳이 쓰시더군요. 한국어로는 ‘에… ’ ‘음…’ ‘글쎄…’ 도 있는데, 사실 한국사람들이 버릇처럼 많이 쓰는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아니’입니다.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아니, 밥은 먹었고?”
“아니, 세상에 비가 이렇게 오다니…”

‘아니’라는 부정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한국인입니다. 피해야 하는 버릇일까요? 우리는 이미 부정의 언어와 태도가 몸에 완전히 밴 사람들인가요?

긍정 문화의 가장 큰 폐해는 부정에 대해서까지 긍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권모술수’ 권민우 변호사 캐릭터는 권력자를 수긍하는 한편 본인도 권력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부당한 지시도 ‘현실’이라며 긍정하고 약자의 어려움에는 고개를 돌리는 흔한 우리네.

물론 이런 무조건적인 긍정의 태도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며 성장해 나가죠. 드라마 마지막 회에선 ‘저도 좀 바보같이 살려고요’라며 ‘아니오’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긍정이 더 쉽습니다. ‘예’라고 대답하고 나면 사실 더 이상 할 말도 없습니다. ‘이건 먹어도 돼’라면 그냥 먹으면 되니까요.

‘아니오’라고 부정하면 더 어려운 상황이 닥칩니다. 아닌 이유를 설명을 해야 합니다. 먹어도 되는지 검증해야 합니다. ‘아니오’는 ‘왜’로 이어집니다. 그 다음엔 ‘그게 아니면 어떻게 할 건데?’로 또 이어집니다. 대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이야기가 꼬리를 뭅니다. 발전합니다.

인류가 여태까지 진보하고 발전해 온 것도 “이건 아니야” “이래선 안 돼”라고 생각하고 외친 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 덕분 아닐까요?

긍정이 쉬운 길이고, 부정이 어려운 길이라해도 굳이 힘든 길을 갈 필요 있을까요? 가야 하는 길이라면 가야겠죠. 괜찮습니다. 부정을 부정하면, ‘쉬운 길’ 긍정이 되니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강한 긍정이라고 국어시간에 배웠잖아요. 오늘도 저는 씩씩하게 ‘아니오’를 외쳐보렵니다.

2020년 7월2020년 7월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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