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광복 후 일본 노동운동 이끌었다”

  • 뉴시스
  • 입력 2019년 9월 16일 11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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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강제징용 김일수, 해방 이후 하나오카 광산노조 위원장
한·중·일 노동자 연대, 징용 피해자 진상 규명과 유해 발굴·송환 주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된 한국인 노동자가 광복 직후에도 일본에 남아 지역 노동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16일 전남과학대 김정훈 교수에 따르면, 해방 전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1940년대 후반 일본 아키타현 하나오카 광산에서 중·일 노동자와 연대하며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해방 전후로 집단행동을 벌이며 제국주의와 사측의 부당한 대우에 저항했다.

김 교수는 최근 일본 민족예술연구소 차타니 주로크 전 소장을 통해 조선인 징용자 이우봉이 쓴 증언록 ‘재일 1세가 증언한다’(2002)를 입수, 관련 내용을 확인했다. 그동안 증언록은 시중에 판매되지 않아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증언록에는 경상도 출신으로 1942년 강제징용돼 하나오카 광산에서 일한 김일수(金一秀)가 해방 직후 아키타 지역 노동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김일수는 해방 직후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일본의 핍박에도 1947년 설립된 하나오카 자유노동조합의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 노동조합의 서기장은 증언록의 저자인 이우봉이다.

하나오카 자유노동조합은 설립총회에만 조선인 30여명, 일본인 100여명 등이 참석했다. 노조 가입 조합원 수는 200명이 넘었다. 김일수는 다수인 일본인의 지지를 받아 노조 지도부로 뽑혀 활동했다. 김일수는 위원장이 된 직후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 피해 관련 진상규명과 피해 지원에 적극 나섰다.

특히 김일수는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45년 하나오카 광산에 끌려간 중국인 포로 986명 중 절반가량이 아사·혹사·사형 등으로 목숨을 잃은 ‘하나오카 사건’의 중국인 유족 대표도 맡았다.

그는 일본인 대표를 강력하게 설득해 중국인 피해자 유골발굴·수습에 처음으로 착수하도록 했으며 유해를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김일수는 1950년 일본의 양심적 작가 마쓰다 도키코가 중국인과 함께 피해현장을 찾아 중국 피해자 유골수습을 할 때도 직접 안내 역할을 맡았다. 유골송환 이후 일본 각지에서 펼쳐진 관련 행사와 보고집회에도 마쓰다 작가와 동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근거로 김일수가 중국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인에게도 신뢰를 받았다고 증언록에는 적혀 있다.

이후 김일수의 행적은 1960년대 초 월북한 뒤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김정훈 교수는 “김일수 등 은 조선인 피해자의 진상규명은 물론이고 하나오카 사건 중국인 피해자 유골을 수습해 본국으로 송환하는 운동에 앞장섰다”면서 “이는 중·일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또 “해방 직후 일본 정부가 위령집회에 경찰을 투입하는 등 방해 공작을 펼치는 상황에서도 일본 지식인과 한·중·일 3국의 노동자들이 연대해 피해자 지원활동에 나선 사실은 의미가 작지 않다”고 강조했다.

【광주=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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