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인 2일 저녁, 인파로 넘치는 서울의 한 번화가에서 만나기로 한 윤미영 씨(47·여·가명)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목도리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여성은 한 명뿐이었다. 윤 씨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화들짝 놀랐다. “저를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윤 씨는 지난달 22일 발생한 ‘강서구 전처 살인 사건’ 이후 몸을 더 사리게 됐다. 이 사건 피해자 이모 씨(47)와 윤 씨는 공통점이 많다. 동갑내기에 세 딸이 있고, 20년 넘게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렸으며, 이혼 뒤 숨어 지내는 동안 남편에게서 살해 협박을 받은 것까지.
현재 윤 씨는 수도권의 한 원룸에, 세 딸은 전국 각지에 각각 떨어져 산다. 전 남편 A 씨에게 발각되지 않으려 네 모녀가 뿔뿔이 흩어진 것. 강서구 전처 살인 사건을 접한 이후 이들의 일상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윤 씨는 A 씨가 타던 승용차와 같은 차종만 봐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집에 있을 때 초인종이 울리면 심장이 터질 듯 뛴다. 딸들은 사건 이후 “엄마 성(性)을 따르기 위해 개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윤 씨는 “아빠를 자극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하지 말자”고 다독였다.
윤 씨는 6년 전인 2012년 집에서 탈출하기 전까지 지속적인 A 씨의 폭행에 시달렸다. 첫 딸을 임신했을 때 “내 아이가 아닌 것 같다”며 만삭인 윤 씨의 배를 칼로 찌르려한 게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후 “다른 남자에게 한눈을 판다”며 술에 취해 주먹으로 때리고 가구를 부수기도 했다. A 씨는 일을 하는 동안에도 윤 씨에게 수시로 전화를 했고, 받지 않으면 집으로 달려와 폭행했다.
견디다 못한 윤 씨는 세 딸을 데리고 집에서 탈출했다. 이때부터 A 씨의 추격이 시작됐다. 모녀는 위치를 추적당할까봐 보호시설에 머무는 동안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았다. 병원 등 외부 시설을 이용할 때는 보호시설에서 1시간 이상 떨어진 곳만 갔다.
하지만 A 씨는 남편과 아버지라는 지위를 이용해 모녀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딸이 실수로 보호시설 근처 편의점에서 체크카드를 쓰자 A 씨는 집으로 배달된 카드 내역서를 보고 편의점 위치를 확인했다. 이어 관할 구청에 ‘도망간 아내와 딸들이 근처에 있으니 찾아내라’고 민원을 냈다. 구청은 모녀가 머무는 보호시설 관계자에게 “남편이 계속 민원을 해서 못 살겠다”며 조치를 요구했고, 윤 씨 모녀는 다른 시설로 이동해야 했다. 새 쉼터로 옮긴 지 며칠 되지 않아 이번엔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A 씨가 “아내와 딸들을 찾아 달라”며 실종신고를 한 것. 윤 씨 모녀는 또 다시 짐을 꾸렸다. 가출 후 1년 간 전국의 보호시설 6곳을 떠돌았다.
윤 씨는 2013년 이혼을 결심했다. 윤 씨는 법정에서 “재산분할도, 위자료도 포기할 테니 이혼만 하게 해 달라”고 읍소했다. 하지만 이혼 뒤에도 A 씨는 윤 씨 친정 식구들을 찾아다니며 “지구 끝까지 쫓아가 모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모녀는 매년 월세방을 옮겨 다녔고 친정에도 발길을 끊었다. “살고 싶어서 집을 나왔는데 세상은 제게 ‘그냥 참고 살지 그랬느냐’고 말하는 것 같아요. 가해자는 당당하게 다니는데 저는 언제까지 숨어살아야 하나요.”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는 내내 윤 씨는 창 밖의 거리를 쉬지 않고 살폈다. 작별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목도리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인파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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