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도 밤에도 하루 카톡 300개, ‘카톡 퇴근’은 언제…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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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행복원정대 : ‘워라밸’을 찾아서]1부 완생을 꿈꾸는 미생들
<1>카톡 족쇄에 갇힌 3년차 직장인

《국내 직장인 10명 중 7명 이상(75.6%)은 퇴근 후에도 스마트폰으로 업무를 본다.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신저를 통한 업무 지시로 일주일에 10시간을 더 일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직장인 2402명을 조사한 결과(2016년 기준)다. 화장품 회사 영업팀에서 근무하는 3년차 직장인 장연주(가명·26) 씨는 하루 최대 300개가량의 업무 카톡을 받는다고 했다. 장 씨가 취재팀에 밝힌 ‘카톡과의 하루’를 재구성했다.》

동아일보는 워라밸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하기 위해 ‘웹뉴(웹툰 뉴스)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했다. 취재팀이 찾은 워라밸 붕괴 실태를 웹툰 작가들에게 보내 매회 관련 웹툰을 4컷짜리로 싣는다. 1회 ‘카톡지옥’은 웹툰 ‘여탕 보고서’로 유명한 마일로 작가가 회사원 장연주(가명) 씨의 사연을 듣고 그렸다.


오후 11시 야근을 마치고 좀비처럼 집에 들어왔다. 샤워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챙긴 건 다름 아닌 스마트폰. 회사에서 카톡이 올까 싶어서다. 아니나 다를까. “카톡! 카톡!” 세면대 위 스마트폰이 날 애타게 찾는다. 스마트폰에 왜 방수 기능이 있는지 한국 직장인들은 잘 안다. 샤워기를 끄고 젖은 손으로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이게 웬일인가. 아무것도 온 게 없다. ‘아,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구나.’ 누군가는 이를 ‘유령 울림’ ‘디지털 이명(耳鳴)’이라고 했다. 퀭한 눈으로 세면대 거울 속 나를 본다.

막 잠이 든 밤 12시 반. 카톡 알림이 고요한 방을 뒤흔든다. 설마 이번에도 환청? 스마트폰 화면에 ‘팀장님’이란 글자가 보인다. ‘내일 상무께 보고드릴 자료 준비는 잘됐지?’ 긴 한숨과 함께 ‘넵, 준비됐습니다’라고 답 메시지를 보낸다.

회사원 사이에선 ‘넵병’이라고 부른다. 상사의 카톡에 기계적으로 ‘넵’이라고 답을 보내는 일종의 직업병이다. 넵이라고 다 같은 넵이 아니다. ‘넹’은 대답은 하지만 일은 이따 하겠다는 의미다. ‘네…’는 내키지 않지만 알았다는 뜻. 넵 옆에 느낌표를 붙이면(넵!) 지금 바로 하겠다는 얘기다. ‘앗! 네!’는 내가 일을 실수했다는 뜻이다.

‘심야 카톡’에 잠이 달아났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켠다. ‘○○매장 수량 및 제품 보고’ 문서를 열어 빠뜨린 게 없는지 다시 확인했다. 이제는 무뎌져 화도 나지 않는다.

오전 8시 출근 중 어김없이 단톡방(단체 카톡방)에 매출 보고서와 팀장의 지시가 올라온다. 이어지는 카톡의 향연…. ‘네’ ‘넵 알겠습니다’ ‘확인했습니다’…. ‘지옥철’에서 누군가 대답이 늦으면 이번엔 팀장 없는 단톡방이 울린다. ‘○○ 씨 대답하라’는 과장의 성화가 이어진다. 현재 회사 단톡방만 8개다. ‘팀장 없음’ ‘팀장·과장 없음’ 등 단톡방 이름도 참 다양하다. 업무 관련 카톡은 하루 평균 300여 개. 업무 지시 외에 상사들의 농담까지 합하면 400개가 넘는다.

오전 7시부터 밤 12시까지 ‘카톡’이 끊이지 않다 보니 소위 ‘안읽씹’(안 읽고 카톡을 씹는 일)이 불가능한 구조다. 10명이 모인 단톡방에서 숫자 9가 사라지지 않으면 팀장이 바로 묻는다. “누가 확인 안 했니?”

오후에 매장 4곳을 둘러보기 위해 외근을 나간다. ‘지금 어디 매장이니?’라는 팀장의 카톡이 온다. 1분 안에 ‘답톡’을 하지 않으면 또 온다. 지난주엔 5분 늦게 확인했더니 ‘외근한다면서 수면카페에서 자고 있는 것 아니냐’ ‘외근할수록 안(회사)과 소통이 잘돼야 한다’는 ‘잔소리 카톡’이 쏟아졌다.

업무 특성상 매장에서 바로 퇴근할 때가 많다. 이때마다 뒷골이 땅긴다. 단톡방에 ‘퇴근하겠습니다’라는 문자를 남겨야 하는데, 늘 독립운동 하듯 용기가 필요하다. 오후 8시 반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전송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이때부터 ‘갠톡’(개인 카톡)이 울린다. 오전 11시에 보고한 제품 수량 자료를 이제야 확인한 팀장이 꼬치꼬치 묻기 시작한다.

야심한 밤에 회사 카톡이 오면 급히 스마트폰을 ‘비행기 탑승 모드’로 바꿀 때가 있다. 카톡 내용을 확인하면서도 읽지 않은 상태로 숫자를 남겨둘 수 있어서다. 읽은 게 확인되는 순간 추가 카톡이 날아오는 걸 방지하는 ‘꿀팁’이다. 하지만 오늘 밤 날아든 카톡 내용을 확인한 뒤 ‘비행기 탑승 모드’를 바로 껐다. ‘연주 씨, 내일 오전까지 PPT(파워포인트) 준비해줘’라는 팀장의 카톡에 ‘넵!’이라는 답톡을 남기지 않을 수 없어서다.
 

▼ “나도 상무님 카톡에…” 김부장의 항변 ▼
“샐러리맨 처지에 피할수 없는 일”
“전화대신 카톡… 일종의 배려” 반론도


퇴근 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업무 카톡(카카오톡)에 스트레스를 넘어 분노하는 젊은 직장인이 많다. 그렇다고 “왜 팀장님은 굳이 퇴근 후 카톡을 보내세요”라고 따질 수 있는 ‘간 큰’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 동아일보 취재팀은 이들을 대신해 주요 대기업 부장들에게 퇴근 이후 업무 카톡을 날리는 이유를 물었다.

A기업 부장은 “누군들 하고 싶어서 그러느냐”고 반문했다. “팀원들은 팀장에게 카톡 받죠? 부장은 상무에게 받아요. 상무는 전무, 전무는 부사장에게 받겠죠. 상사도 다 같은 월급쟁이예요. 회사를 다니는 한 어쩔 수 없는 거죠.”

오히려 직원들을 위한 ‘배려’라는 반론도 나왔다. B기업 부장은 “부장 목소리 듣기 싫다고 하니까 전화 대신 카톡 하는 거예요. 그럼 차라리 전화할까요?”라고 했다. C기업 부장은 “밤에 카톡으로 ‘내일 오전 중 ○○ 자료를 준비해 달라’는 메시지를 종종 보낸다”며 “미리 알려줘야 업무에 차질이 없다. 과음을 하거나 늦잠을 자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퇴근 후 업무 카톡을 아예 금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퇴근 후 카톡 금지’ 법안을 발의한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보좌진은 “우리도 긴급한 일이 있거나 일이 많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밤 11, 12시에 업무 카톡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유사한 법안을 낸 이용호 국민의당 의원은 “대안으로 업무 카톡을 보고 일하면 근로시간으로 인정해 수당을 더 주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주 일생활균형재단 WLB 연구소장은 “법으로 금지해봤자 지켜지기 어렵다”며 “노사가 소통을 통해 퇴근 후 워라밸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등 사내 문화가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잡학사전 : ‘연결되지 않을 권리’
퇴근하면 업무에서 해방…佛 작년 노동법에 첫 명시


퇴근 후 회사나 상사의 연락을 받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확산으로 주목받는 노동기본권이다. 프랑스가 지난해 50인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세계 최초로 노동법에 반영해 시행했다. 퇴근 후 연락이 필요한 사업장은 노사 합의로 방법을 정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2016년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이어 지난해 이용호 국민의당 의원이 ‘퇴근 후 카톡(카카오톡) 금지법’을 발의했다. 다만 입법 가능성은 높지 않다. 고용노동부는 현행법 내에서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게 효과적이라고 보고 조만간 그 방법을 공개할 예정이다.

신규진 newjin@donga.com·김윤종 zozo@donga.com·서동일 기자·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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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원정대#워라밸#카톡#카톡 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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