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9시경 가족들이 한데 모여 추석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 시간. 경기 고양시의 30㎡(약 10평) 남짓한 술집에 동아일보 기자를 포함한 20, 30대 남성 3명이 모였다. 모두 모바일 동호회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처음 만났다. 이들은 스스로를 ‘혼추족’(홀로 추석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조상 덕을 못 본 탓인지 올해 입사 원서를 내는 줄줄이 탈락하고 있어요.”
취준생 김모 씨(26)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조상 덕 본 사람은 해외 여행가고 덕 못 본 사람만 남아 차례를 지내는 게 현실”이라고 푸념했다. 부모와 동생은 이틀 전 광주의 큰집으로 떠났다. 반항심에 혼자 집에 남아 배달음식과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계기로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더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위로도 편한 마음으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 “모르는 사람이 속마음 터놓기 좋아요”
본보가 만난 혼추족들은 추석연휴만이라도 불편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모 씨(24·여)는 “불편함은 사실 익숙함 때문에 생긴다”고 말했다. 보여주기 싫은 약점을 친한 사람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건넨 덕담이 잔소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김 씨는 익명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도피 창구’라고 불렀다.
대기업 회사원 김정진 씨(30)는 올해 처음으로 처음 만난 사람들과 국내 여행을 다녀왔다. 서울에 자취하고 있는 그는 3일 오후 대구 본가에 내려가는 대신 SNS 오픈 채팅방을 개설했다. ‘3년차 남자 회사원들의 여행’이 주제였다.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3명이 추려져 그의 여행 동지가 됐다. 2명 모두 그와 마찬가지로 서울에 자취하고 있는 직장인이었다.
이들은 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만나 전북 전주로 출발했다. 차량은 가장 연장자인 32세 이모 씨가 가지고 왔다. 여행 테마는 맛집 기행. 전남 여수 목포 등을 거쳐 여정은 2박 3일간 이어졌다. 경비는 1인당 30만 원이었다. 숙소는 게스트하우스와 민박이었다.
김 씨의 혼추여행 계획도 “이제는 결혼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집안 어른들의 반복된 질문 공세의 두려움에서 비롯됐다.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목적 없이 떠난 여행이 마치 대학 초년생 때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고 말했다. 누구 하나 선입견 없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여행이 만족스러웠다고도 했다. 김 씨는 “함께 커피 한 잔, 소주 한 잔 하며 회사 이직 고민, 이성문제 등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었다. 현실로부터 완벽히 도피했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 혼추족 돕는 혼추족도 등장
여행 대신 홀로 추석을 보내는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돕는 경우도 있었다.
경기 남양주시에 살고 있는 이정미 씨(가명·27·여)는 부모님과 함께 큰집을 가는 대신 집에 남아 빵을 만들었다. 오픈 채팅을 통해 만난 같은 동네의 또래 여성과 함께였다. 둘은 집에서 직접 반죽을 빚어 7시간여 동안 100여 개의 빵을 구웠다. 이튿날인 5일 오전에는 홀로 추석을 보내는 서울 성동구와 광진구의 홀몸노인 가구 10곳을 찾았다. 이들은 주로 이 씨가 대학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알게 된 사람들이다. 가족의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소외된 처지에 있다.
이 씨는 3년 만에야 다시 인사드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홀로 남겨진 추석도 쓸쓸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며 소회를 밝혔다. 지난 5개월 간 제빵기술을 배운 보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6일 부산에서는 여대생 김모 씨가 SNS 오픈 채팅방에서 만난 사람들과 송편을 빚어 이웃에게 전달했다. 그는 그 이유로 “추석의 의미가 늘 나눔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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