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왜 남자들한테만 일을 해야 한다고 그러십니까? 요즘 점심 때 시내 음식점에 한 번 가보세요. 맛있는 것은 부인들끼리 모여 앉아 다 먹고 있지요. 헬스클럽 한 번 가보세요. 땀 뻘뻘 흘리며 운동하고 있는 부인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데 왜 남자들에게만….”
얼마 전 노후설계 관련 강의장에서 한 남성 참가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지금 같은 인생 100세 시대에는 모자라는 노후자금 때문에도 그렇지만 퇴직 후 30~40년 동안의 보람 있는 삶을 위해서라도, 수입을 얻는 일이든 취미활동이나 사회공헌 활동이든, 일을 갖는 게 중요하다. 100세 시대의 가장 확실한 노후대비는 평생 현역이다. 이런 취지의 강의를 했었는데 듣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누가 일을 하기 싫어서 안하는가? 50대 초반이면 조기퇴직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지금과 같이 청년실업이 넘쳐나는 시대에 마땅한 일자리는 있는가? 집에 있는 아내들은 남편들의 이런 답답한 심정을 알고나 있는가?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많은 남성들이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그 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던 아내와 외식도 하고 여행도 하며 오순도순 정답게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된다. 아내는 더 이상 남편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모임을 갖거나 이런저런 취미를 즐기느라 바빠서 예전처럼 남편을 챙기려 들지 않는다. 남편들 입장에서는 이런 아내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들은 놔두고 남편들에게만 평생현역을 말하면 화가 날 만도 하다.
따라서 아내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상실감에 빠져있는 남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돈이 되든, 안 되든 남편들이 몰두할 수 있는 일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30~40년의 긴 후반 인생에서 부부사이의 화목을 위해 남편이 소일거리를 갖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기 때문이다. 아내들이 해야 할 일 중 특히 중요한 것은 남편들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남의 눈을 의식함이 없이 긍지를 갖고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일 것이다.
남편들 또한 노후생활에 대한 부부의 생각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다가 퇴직을 했는데 ‘삼식이’니 ‘영식이’니 하는 조롱 섞인 말을 들으면 화도 나겠지만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자기 아내만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다른 집 아내들도 다 똑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필요도 있다.
실제로 관련된 사회조사 결과들을 보면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 예로,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2014년 노후생활에 대한 부부의 생각 차이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남편의 60% 정도는 하루의 절반이상을 아내와 같이 있고 싶어한 반면, 남편과 같은 생각을 가진 아내의 비율은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아내들은 힘든 직장생활을 하다가 퇴직해서 돌아온 남편들을 왜 그렇게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부부 간의 신뢰가 깨져서 나타나는 현상일까, 아니면 부부 어느 한쪽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100세 시대가 되면서 퇴직 후에 부부 단 둘이만 사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종래에는 자녀를 여럿 낳는데다 수명도 짧고 손자손녀를 봐주기도 해야 하기 때문에, 자녀가 독립한 후, 남편과 아내 단둘이만 사는 시간이 매우 짧았다. 서울대 한경혜 교수는 2013년 ‘부부 단둘이 사는 시간이 1.4년’에 불과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자녀를 적게 낳는데다 수명까지 늘어난 오늘날에는, 부부 단둘이만 사는 시간이 20년 넘게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역사상 그런 경험이 없다. 단둘이 사는데 대한 노하우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남편과 아내의 은퇴관의 차이가 우리나라에만 나타나는 현상인 것도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본의 은퇴전문가 오가와 유리가 2014년 ‘일본의 인기 있는 은퇴남편 1순위’를 소개한 자료에 의하면, 가장 인기 있는 남편은 집안일 잘 도와주는 남편, 건강한 남편, 요리 잘 하는 남편, 상냥한 남편 중 그 어느 것도 아니고 ‘집에 없는 남편’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아내들이 모두 이렇다면 한국 남편들도 부부의 생각차이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남편은 아내와 함께 인생 2막을 꿈꾸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아내는 가정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들은 퇴직 후 ‘나만의 시간’을 기획하고 준비해야 한다. 재취업해서 수입을 얻는 일이든, 자기실현 활동이든, 사회공헌 활동이든, 체력이 허용하는 한 소일거리를 가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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