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新명인열전]“한라산은 나의 연인… 산행땐 온갖 걱정 사라지죠”

  • 동아일보

<8> 한라산 1036회 등반 고석범씨

한라산 정상을 1000번 넘게 오른 고석범 씨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하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한라산 정상을 1000번 넘게 오른 고석범 씨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하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건강 때문에 시작한 한라산 오르기는 고석범 씨의 삶을 바꿔놓았다. 고 씨는 한라산 정상에 서면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고석범 씨 제공
건강 때문에 시작한 한라산 오르기는 고석범 씨의 삶을 바꿔놓았다. 고 씨는 한라산 정상에 서면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고석범 씨 제공
“자신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와 강도에 맞춰서 등산을 해야 합니다. 무리를 하면 탈이 생겨요. 산속에서 이상이 나타나면 대처가 힘들기 때문에 보다 안전에 신경을 써야 산행이 즐거워집니다.”

19일 오후 한라산 관음사 등산코스. 한국전력 제주전력지사에 근무하는 고석범 씨(59·제주시 이도2동)가 가뿐한 걸음으로 하산을 마쳤다.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을 다녀왔지만 땀은 고사하고 거친 숨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치 동네 뒷산을 다녀온 듯 편안해 보였다. 이날은 고 씨가 1036회째 한라산 정상을 밟은 날이다. 한라산 정상을 1000회 이상 오른 사례는 극히 드물다.

○ 한라산은 내 운명

고 씨가 등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건강 때문이었다. 2002년 7월 건강검진에서 ‘재검’ 통보를 받았다. 잦은 음주와 업무 스트레스 등으로 고혈압 증세가 있다는 것이었다. 약을 처방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평소 건강을 자신했던 고 씨에게는 충격이었다. 그해 겨울 한전 제주지사 산악회에서 실시하는 등산 이야기를 듣고 동료에게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당시 산행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땀으로 옷은 흥건히 젖었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그날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주말마다 등산을 하기로 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한라산의 속살을 마주한 순간 운명처럼 여겨졌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몸을 단련하는 데 등산이 최고라고 확신했습니다.”

2003년부터 산행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날짜, 소요 시간, 특기 사항 등을 적었다. 산행을 못하면 그 사유를 적었다. 4, 5년이 지나자 ‘1년에 100회 등산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바로 실행에 들어갔지만 주말 등산으로는 도저히 1년에 100회를 채울 수 없었다. 고민하다 정상을 하루에 2번 다녀오는 산행을 감행했다. 2번 왕복에 10시간가량이 걸렸다. 체력과 노하우가 생기면서 100회 이상 등산한 해가 5번이나 됐다.

“한라산은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하기에 싫증을 느낄 새가 없어요. 이런 한라산은 내게 연인이자 스승이자 벗이기도 해요. 온갖 걱정이 봄눈 녹듯 사라지죠. 때론 인자한 어머니처럼 다가왔다가 순간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으로 돌변하는 것처럼 기후가 변화무쌍합니다. 만만한 코스라고 자만심을 갖고 덤볐다가는 탈이 생겨요. 산행할 때는 항상 겸손한 마음이 필요해요.”

고 씨는 2005년 한라산등산학교를 수료한 뒤 제주도산악연맹 한라산악회에 가입했다. 등산에 대한 이론적인 무장을 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얻었다. 현재 한라산지킴이로도 활동하고 있다. 산악장비와 함께 위급한 상황에 처한 등산객을 돕기 위한 응급약품을 갖고 간다. 산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담을 배낭도 따로 챙긴다. 한라산이 건강을 되찾게 해준 은인이기에 환경을 정화하고 등산객들에게 봉사하면서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이다.

○ 끊임없는 도전

다리에 힘이 붙고, 10시간 이상 걸어도 체력이 받쳐 주자 마라톤이 눈에 들어왔다. 마라톤대회에서 5km 종목을 처음 뛰어보니 할 만했다. 새로운 환경과 거리, 종목에 대한 도전을 시작하자 봇물이 터진 것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지난해까지 마라톤 풀코스 59회 완주, 울트라마라톤(100km 이상) 27회 완주를 기록했다. 수영, 사이클, 마라톤을 하는 철인3종 경기를 26회 완주하는 괴력을 보이기도 했다.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등산과 마라톤에 빠져들자 아내(56)가 말리고 나섰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등산하는 모습을 보고 아내는 최고의 후원자였어요. 하지만 가정을 팽개치다시피 하면서 산행에 나서자 주말마다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내는 내가 너무 운동에 빠져서 오히려 몸을 망칠 것으로 걱정했지만 결국 말리지 못했죠.”

키가 161cm인 고 씨도 각종 대회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걱정이 있었다. 몸무게가 68kg에서 60kg으로 줄어들면서 훨씬 가벼워지고 환절기마다 나타났던 비염과 감기는 사라졌지만 얼굴은 노인처럼 쭈글쭈글해졌다. 주변에서는 “어디 아픈 것이 아니냐”며 오히려 걱정을 했다. 전문가 등에게 해법을 문의한 결과 근력운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등산, 마라톤 등 유산소운동에 주력하다 보니 근력운동에 소홀했던 것이다.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6개월 동안 헬스 강사로부터 기구 사용법과 호흡법 등을 배웠다. 등산이나 마라톤을 하지 못하는 아침이나 저녁에 헬스장을 찾는다. 주중에는 근력운동과 훈련, 주말에는 산행과 마라톤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어느새 주름이 깊었던 얼굴에 살이 붙으면서 탱탱해졌다. 그는 또다시 도전에 나선다. 한라산 정상 높이인 1950m의 숫자와 같은 1950회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앞으로 68세까지 9년 동안 900여 회를 더 올라 목표를 달성한다는 각오다.

고 씨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어린 시절을 보냈다. 키가 작아서 볼품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술을 좋아했던 회사원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옆집 아저씨 같았던 그가 등산으로 인해 한라산의 ‘작은 거인’으로 변했다. 중도에 포기를 하지 않는 꾸준함, 식지 않은 열정이 그 비결이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한라산#1036회#고석범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