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 이화여대 총장 “남녀공학에선 이룰 수 없는 특별한 리더십 양성”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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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공인 ‘여성리더 산실’ 이화여대 김선욱 총장에게 듣는다

김선욱 이화여대 총장은 “한국의 경제력은 세계 10위권이지만 국내 대학의 경쟁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며 “획일적인 잣대로 재단하지 말고 자율성을 확대해줘야 대학경쟁력이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김선욱 이화여대 총장은 “한국의 경제력은 세계 10위권이지만 국내 대학의 경쟁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며 “획일적인 잣대로 재단하지 말고 자율성을 확대해줘야 대학경쟁력이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김선욱 이화여대 총장은 대뜸 8월 말 열렸던 유엔 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의 조찬 간담회 얘기부터 꺼냈다. 연사로 나온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헤드테이블에 여성이 2명뿐인 것을 발견하고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어렵다’고 사례를 들어가며 길게 얘기했다고 했다. 헤드테이블에 앉은 여성은 반 사무총장의 부인과 김 총장 본인이었다.

반 사무총장은 유엔 사무차장 이상 28개 자리 중 13개의 주인을 여성으로 임명했다. 처음에는 한 자리에 후보를 3배수 추천할 때 여성이 아예 없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1명은 꼭 여성을 포함시키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임명된 여성들은 일을 너무 잘한다고 반 사무총장은 평가했다.

김 총장은 그날 ‘인구의 절반이 활용되지 않는 나라는 발전할 수 없다’는 반 사무총장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고 했다. 그동안 이화여대가 강조해온 여성 리더십의 가치와 같은 맥락의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리더십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20세기가 경제성과 기능성을 중시하는 남성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감성과 상상력이 중심인 여성의 시대다. 세계가 이성 중심의 차가운 남성적 리더십이 아닌 따뜻한 리더십에 주목하고 있다. 여성적 가치는 나눔의 가치, 상생의 가치와 일맥상통한다. 여성 리더십이 강한 사회는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고 이기면서 베풀 수 있다.”

―여성 리더를 키우는 이화여대만의 역할이 있다면….

“영국 가디언지가 전한 ‘차세대 여성리더를 키우는 방법’을 소개하면 대답이 될 듯하다. 이 신문은 ‘롤 모델을 최대한 많이 발굴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려면 참고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변화를 만들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기질을 길러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화여대는 여성인력이 필요한 산업분야를 긍정적으로 보도록 하고 창의적 리더가 되겠다는 꿈을 심어주는 조기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총장은 물론이고 교수의 절반이 여성인 우리 대학에서 학생들이 롤 모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화여대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초 여성 리더’의 산실이다. 유중근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한명숙 전 국무총리, 전효숙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손병옥 푸르덴셜보험 사장, 손지애 전 CNN 서울지국장, 박혜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 등이 해당 직위에서 ‘최초 여성’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김 총장 본인도 최초의 여성 법제처장을 지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여자대학이 설 자리는 좁아지고 있다.

“여대 위기론이 나오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1980년대 중반에만 해도 세계적으로 여대가 300여 곳 있었지만 현재 50여 곳으로 줄었다. 남녀평등 수준이 올라가고 여학생들 자신이 남녀공학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화여대는 세계 유일의 여성 종합대학으로 남녀공학과 똑같은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는 특별함이 있다고 자부한다. 남녀공학에서는 이룰 수 없는 학문적 인성적 성취가 가능하고 여성에게 적합한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성별에 따른 차별 없이 역량과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을 갖추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나눔의 가치를 강조한다고 들었다.

“2009년 캄보디아 왕립 프놈펜대(RUPP)에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인 ‘이화-RUPP’를 만들었다. 알다시피 캄보디아는 사회복지학과는 물론이고 사회복지사조차 없을 정도로 ‘사회복지’ 미개척 지역이다. 지난해 이화-RUPP 첫 졸업생 14명을 배출했고 이 중 3명이 우리 학교가 현지에 설립한 ‘이화사회복지센터’에 사회복지사로 취업했다. 나머지 졸업생들도 캄보디아와 싱가포르의 대학교수나 비정부기구(NGO)의 관리자로 활동하고 있다.”

김 총장은 이화여대가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고 이를 전 세계와 공유하기 위해 운영하고 있는 ‘글로벌 트라이앵글 시스템’도 자랑했다. 이화 글로벌 파트너십 프로그램(EGPP)은 개발도상국 여성 인재를 초청해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학위 과정으로 2006년 국내 대학 중에서는 처음으로 도입했다. 지금까지 33개국 154명이 도움을 받았다. 이화-KOICA 프로그램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함께 2007년부터 개발도상국 여성 공무원에게 4학기 전 과정 동안 전액 장학금과 함께 생활비를 지원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이화 글로벌 임파워먼트 프로그램(EGEP)은 여성 인권과 공공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NGO 및 공익 부문 리더들을 초청해 2주간 함께하는 교육과정이다. 김 총장은 “이화여대는 세계를 향한 글로벌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눔 못지않게 나라 밖에서 배울 것도 여전히 많은데….

“2001년 국내 대학 처음으로 국제학부를 세운 이래 69개국 893개 기관과 다자간 교류협정을 체결했다. 9개 외국 대학과는 복수·공동학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계절학기 프로그램인 ‘이화국제하계대학’은 시작한 지 40년이 넘었다. ‘교수 인솔 해외학습 프로그램’과 ‘이화 글로벌 이니셔티브 탐사 프로그램’도 꾸준히 진행하는 해외교류 활동이다. 2006년 시작한 ‘이화-하버드 섬머스쿨 프로그램’은 미국 하버드대와 맺은 국내 대학 최초이자 유일한 파트너십 바탕 위에서 이어오고 있다. 앞으로도 글로벌 여성 교육의 허브라는 책무를 다할 생각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일-가정 양립은 여전히 힘들다.

“나는 ‘출산은 대신 못하지만 육아는 같이 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고위직 절반에 여성이 진출하면 일-가정 양립은 많이 개선될 것이다. 우리 대학은 여성의 출산과 육아 등 생애주기를 고려한 교육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있다. 5월 말에는 서울 오뚜기센터에서 대학 내 직장보육시설 건립 지원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오뚜기가 일-가정 양립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30억 원을 지원한다. 대학은 200∼300명의 어린이가 지낼 수 있는 직장보육시설을 대학 안에 새로 설치한다. 이 시설은 교직원 자녀는 물론이고 대학원생들의 자녀도 다닐 수 있도록 대상자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동안 사립대는 일-가정 양립에 사각지대였다. 보육시설이 들어서면 대학 구성원들에게 진정한 선택권이 부여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 총장은 “개교 이후 127년간 이화여대는 여성이 밟지 못한 길, 가보지 못한 길에 최초의 여성, 소수의 여성 지도자를 만들어가는 몫을 수행했다”고 돌아보고 “이제는 국내 대학에 절실한 자율성을 토대로 사회지도자의 반을 인구의 반인 여성의 몫으로 돌려주는 사명에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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