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장난 그만하고 살아만 있어주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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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헬기 탑승 최영환 전무 부인과 5, 6일 카카오톡 대화
페루 “암벽 추락 전원 숨진듯”… 가족들 “아직 희망” 현지 출국

최영환 서영엔지니어링 전무가 사고 이틀 전(왼쪽)과 하루 전날 부인과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헬기 타는데 과부되면 우쩌냐(어쩌냐)”고 전하자 부인은 “이런∼∼∼!!!”이라고 답했다. “고산이라 힘들다”며 페루 유적 사진을 보내며 애틋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H 씨 제공
최영환 서영엔지니어링 전무가 사고 이틀 전(왼쪽)과 하루 전날 부인과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헬기 타는데 과부되면 우쩌냐(어쩌냐)”고 전하자 부인은 “이런∼∼∼!!!”이라고 답했다. “고산이라 힘들다”며 페루 유적 사진을 보내며 애틋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H 씨 제공

“페루에는 어떤 특산물이나 공예품 그런 거 있는지? 특이한 거 있음 사와 봐.”(이하 한국시간 6월 4일 오후 11시 55분·H 씨·최영환 서영엔지니어링 전무의 부인)

“열심히 돈 벌어와.”(5일 오후 1시 28분·H 씨)

“잔다. 내일 쿠스코 간다. 현장 헬기 타러. 과부 되면 우쩌냐(어쩌냐). 큰__ 걱정.”(5일 오후 1시 36분·최 전무)

“이러∼∼∼언!!!!”(5일 오후 1시 37분·H 씨)

“낼 아침 5시 40분(페루 현지 시간)에 모여. 헬기 타러∼. 고산이라 숨 막혀서 약 먹고. 해발 3500m. 조금만 움직여도 숨차네.”(6일 오전 11시 50분·최 전무)

6일 오후 3시경(현지 시간) 한국인 8명 등 승객 14명을 태우고 비행하다 페루 남부 산악 암벽지대에 추락한 헬리콥터에 탑승했던 최영환 서영엔지니어링 전무(49)의 부인 H 씨가 사고 전 휴대전화 메신저인 카카오톡으로 나눈 대화다.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을 것이라는 보도에도 H 씨는 아직도 남편의 사고를 믿지 못하고 있다. 사고를 예견하는 듯한 남편의 메시지가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메신저 마지막 줄에는 사고 소식이 전해진 뒤인 8일 오후 3시 12분 고교생 아들(17)이 보낸 “아빠 --”라는 글이 있었다.

10일 오빠와 함께 사고 현장인 페루로 떠나기 위해 인천공항에 나온 H 씨는 통곡했다. H 씨는 “며칠 전 나눈 대화를 보니 너무 안타깝다”면서 “남편이 저녁을 먹었냐는 메시지를 보내 와 바로 아들이 산책하는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그때가 헬리콥터에 탔을 시간이라) 아들 사진도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흐느꼈다. 강원도 강릉에 살고 있는 시어머니에게는 사고 소식도 알리지 못한 채였다. 그는 “남편은 어딜 가든 그곳 상황을 알려줬다”며 “나에게는 모든 이야기를 다 터놓고 하는 솔직한 사람, 아이들에게는 자상한 아빠였는데…아직 사망 사실이 확정적이지 않은 만큼 남편이 살아있다고 믿고 있다”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페루 남부 푸노 지역의 모요코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을 시찰하고 쿠스코로 복귀하다 실종됐던 한국인 8명 등을 태운 헬리콥터가 산악 암벽지역에서 추락한 것으로 9일 확인됐다. 현재로서는 한국인 외에 네덜란드인 체코인 스웨덴인 각 1명, 조종사를 포함한 페루인 3명 등 탑승자 14명 중 일부라도 생존해 있을 확률은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페루 경찰청은 “남부 마마로사 산의 해발 4950m 높이 눈 덮인 암벽에서 헬기가 충돌한 지점과 기체 잔해를 육안으로 확인했다”며 “현재까지 생존자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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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통신이 공개한 현장 사진에 따르면 드문드문 눈이 쌓인 암벽 일부가 폭발 화재로 검게 그을려 있으며, 아래로 기체 잔해로 보이는 물체들이 흩어져 있다. 페루 내무부 측도 한국 외교통상부에 “암벽과 충돌한 헬기가 두 동강이 났으며 생존자는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수색작업은 계속할 예정”이라고 통보해왔다.

페루 라디오방송 ‘라디오프로그라마스’는 “사고 지점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서 헬기 잔해가 발견된 것으로 미뤄 추락과 동시에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 방송은 또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일부 시신도 발견됐다”고 보도했으나 현지 경찰 측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시신은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 가족들은 “헬리콥터 출발 전 현지 기상상황이 나쁘다는 말을 들었다. 무리한 운항이 사고를 부른 것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들은 10일 속속 페루 현지를 향해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이날 오후 2시 반경 유동배 삼성물산 차장(46)의 부인과 딸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국적을 가진 에릭 쿠퍼 삼성물산 과장(38·네덜란드)의 부인이 사고 현장을 찾기 위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페루 리마로 들어가는 대한항공 KL866편을 타고 출국했다. 오후 3시 15분에는 서영엔지니어링의 최 전무와 임해욱 전무(56)의 가족이 리마로 가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떠났다.

오후 8시에는 삼성물산 김효준 부장(48)과 우상대 과장(39)의 부인과 형 등 가족 4명이 LA행 대한항공 KE011편에 올라 페루로 출발했다. 11일에는 한국수자원공사 김병달 팀장(50)의 가족 등이 출발할 예정이다.

출국하는 김 부장의 부인과 사촌형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에 나온 김 부장의 친구 곽창훈 대신씨앤디 대표(48)는 “효준이의 홀어머님에게는 아들이 칠레에 갔다고 했는데, 오늘 사고 소식을 알게 돼 충격을 많이 받은 상태”라며 “부인과 사촌형은 그래도 아직 효준이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페루로 향했다”고 말했다. 피해자 가족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1979년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효준이와 알게 된 뒤 같은 날 육군 항공단에 입대해 헬리콥터 정비와 승무원으로 군 복무를 함께 했다”며 “사고 당일 통화를 하면서 아침 잘 먹으라고 한 뒤 한국에 돌아오면 소주 한잔 마시자고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 가슴이 먹먹하다”고 전했다.

임해욱 서영엔지니어링 전무의 부인 김모 씨(52)는 “살아있다고 믿고 있다”며 “그 희망 하나만 갖고 이 길을 떠나고 있다”고 힘줘 말했다. 한병하 삼성물산 개발사업부 전무도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만큼 아직 희망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가족들과 페루에 들어가서의 일정은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인천=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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