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정성희]소설가 박범신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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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오로지 문학으로 발언…문학은 이념 아닌 인생에 봉사해야”

‘은교’의 작가 박범신 씨를 햇살 좋은 봄날 서울 종로구 평창동 카페에서 만났다. 약간 마른 몸집의 작가는 60대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경쾌하고 에너지가 충만했다. 그가 영화 속 이적요의 살아 있는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은교’의 작가 박범신 씨를 햇살 좋은 봄날 서울 종로구 평창동 카페에서 만났다. 약간 마른 몸집의 작가는 60대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경쾌하고 에너지가 충만했다. 그가 영화 속 이적요의 살아 있는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박범신의 ‘은교’가 영화로 나온다니 기대로 가슴이 설레었다. 서가에 있던 ‘은교’를 찾아보니 2쇄였다. 책갈피에 ‘나이 듦에 대한 성찰’이라는 나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세상의 추앙을 받는 칠십 노(老)시인 이적요의 ‘적요한’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리게 만든 열일곱 소녀 은교, 스승을 동경하면서도 질투하는 제자 서지우와 이적요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또 하나의 스토리라인이다. 작가 박범신은 “은교를 열일곱 소녀로만 보면 소설을 오독(誤讀)한 것이다. 은교가 40이라도, 60이라도 상관없다. 남자였어도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독자가 작가의 주문대로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다. 평론가 신형철은 “연애소설이 예술가소설로 육박한 사례”라고 썼다. 독자들이 17세 소녀와 노년 시인의 사랑을 담은 애틋한 연애소설로 읽는다 해도 누가 말릴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작가는 연애소설이 아님을 강조하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은교는 본원적 갈망의 끝에서 만난 불멸의 가치를 상징한다. 소설적 재미를 위해서 열일곱 살로 설정했을 뿐이다. 소녀에 대해 노인이 순정을 바치는 내용으로 비치지 않기 위해 소녀의 이름도 ‘은교’라는 중성적 느낌이 나도록 했다.”

―‘은교’를 갈망의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던데 무엇에 대한 갈망인가.

“1993년 절필선언을 했다가 1996년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며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15년 가까이 나를 사로잡은 화두가 ‘갈망’이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꿈을 다루었다. 갈망은 깊은 그리움이다. 초월적 세계에 대한 욕망과 그리움, 영원성과 불멸, 사랑의 완성과 같은 얻기 힘든 가치에 대한 욕망이다. 그런데 절필의 시기가 내가 늙어가는 시기였다. 절필을 통해 소설을 쓰고자 하는 욕망,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망 등 세속적 기득권을 버렸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았다. 절필 자체가 문학으로 얻어낸 현실적 기득권에 대한 욕망을 던져버린 행위였다. 그런데 그걸 던지고 나니까 근원에 대한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늙어가는 것이 두려웠고 시간은 뭐고,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강력한 물음에 직면하게 됐다. ‘은교’는 그것을 가장 정면으로 응시해본 소설이다.”

―이적요가 곧 ‘박범신’이라고 했던데 늙는 것이 두려운가.

“이적요는 완전한 가공의 인물이지만 그의 존재론적 발언과 갈망, 추락의 감정은 내 육성(肉聲)이나 다름없다. 늙음을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게 어디 나뿐이겠는가. 삶의 유한성에 대해 모든 이가 고통을 느낀다.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잠시 잊게 하고 있을 뿐, 본원에 대한 욕망은 누구에게나 도저(到底)한 것이다. 나는 늙음을 좀 다르게 본다. 자기변혁에 대한 욕망이 없으면 늙는 것이고, 자기변혁을 꿈꾸면 청춘이다. 나는 육체적 쇠락의 사이클에 정신을 내맡기고 싶지 않다. 육체적 기운은 못하지만 내적으로는 열정과 갈망이 화염병처럼 분출을 노리고 있다. 육체적 쇠잔이 정신을 훼손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고, 이적요처럼 반항할 것이다. 나 박범신은 그런 의미에서 청춘이다. 청춘 박범신으로 써 달라.(웃음)”

‘은교’에서 “당신, 지금 썩은 관처럼 보여!”라는 청년의 말에 노시인은 죽음보다 더한 굴욕을 느낀다. 농경문화의 전통사회에서 노인은 삶의 지혜를 지닌 웃어른이고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정보화 시대의 노인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홍수 속에서 변화의 속도에 뒤처진 세대라는 인식도 있다.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지하철에서 10대들하고 자리싸움이나 하는 잉여인간으로 노인을 폄하하는 버릇없는 누리꾼들도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영화화가 결정됐나.

“‘은교’를 블로그에 연재할 때 이적요의 나이는 77세였다. 책을 펴낼 때 출판사에서 이적요의 나이를 60대로 줄여달라고 하더라. 주인공이 죽어가는 노인이라면 책이 판매가 안 된다고 하면서. 소설은 독자가 읽어주어야 하기에 기분 나빴지만 타협했다. 은교와 만날 때를 69세로, 죽을 때를 70세로 설정했다. 책도 잘 팔렸고 영화제작자로부터 러브콜을 많이 받았다. 정지우 감독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정 감독의 예전 영화를 보니 인간의 밑바닥 본능을 그려내는 데 재능이 있었다. 이런 감독이라면 노인이 갖는 본능, 짐승 같은 면을 잘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해 동의했다.”

―영화 ‘은교’에 대해 만족하는가.

“세 번쯤 보고서야 영화의 디테일과 참맛을 느낄 수 있었다. 원작을 안 읽은 관객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영화는 주제를 비교적 잘 살린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판에서 노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원작의 주제를 충실하게 밀고 나가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영화 ‘은교’에 대해 특별히 칭찬하는 대목은 두 가지. 하나는 서지우가 승용차에 탄 채 추락하는 장면이다. 배우 김무열은 스승에 대한 배신감과 슬픔, 절망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채 추락한다. 원작에 없는 이 장면은 소설이 가질 수 없는 영화의 강점을 드러낸다. 둘째는 서지우와 은교의 정사 신에 등장하는 “여고생이 왜 남자랑 자는지 알아요? 나도 외로워서 그래요, 나도”라는 은교의 대사를 꼽았다. 영화에서 가장 야할 수 있는 장면이 이 대사로 인해 정당성과 품격을 갖게 된다.

―원작자가 영화에 대해 칭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왜 불만이 없겠는가. 최대 불만은 이적요의 캐릭터가 너무 순화됐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적요가 혼자서 벌이는 반란이다. 삶의 유한성이라는 운명에 순응하지 않은 기록이다. 시간에 굴복하지 않고 ‘맞짱’을 뜨는 것이다. 사회문화가 정해놓은 늙어가는 양식에 대한 통절한 반역이다. 그런데 돌처럼 단단하게 잘 구조화된 이적요의 고독감과 카리스마가 활자로는 잘 드러났지만 영화로는 잘 표현되지 않았다. 자칫하면 노인의 순정 드라마처럼 읽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시간 내에 영화라는 장르에 이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한다. 요즘처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가벼운 코미디가 판치는 시대에 이런 근원적 주제로 진지하게 찍은 영화에 젊은 관객이 몰리고 있다는 점도 작가로선 행복한 일이다.”

―은교는 어떤 여자인가.

“관능적 여자다. 나는 관능을 ‘마음속 폐허’로 본다. 은교는 마음속에 폐허를 가진 여자다. 그녀는 열일곱 소녀의 외피를 갖고 있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를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여자다. 이런 여자야말로 남자들의 로망이다.”

―‘은교’를 블로그에 연재했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활동을 하던데….

“나는 텍스트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텍스트가 좋다면야 그것이 종이이건, 인터넷이건 괜찮다고 본다. ‘은교’를 펴낼 때도 출판사를 설득해 ‘e북’도 함께 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활동도 하고 있지만 그것에 매몰되지 않는다. 내가 트위터 팔로어 수나 기억하고 있다면 그때부터 나는 정파(政派)주의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인터넷상의 소통을 믿지 않는다. 리플이 달린다고 해서 그게 소통인가. 인터넷에는 깊고 대등한 토론도 없고 연대감을 느낄 수 없다. 혼자 지껄이는 것보다 좀 낫지만 그렇다고 그게 본업이 될 수는 없다.”

―요즘 일부 작가는 대규모 팔로어를 끌고 다니며 사회적 목소리를 낸다.

“문학은 이념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봉사해야 한다. 문학은 불행한 사람, 부자유스러운 사람, 상처받은 사람,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왔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 하는 사람들이 범좌파로 분류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 문학이 그런 좌우이념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다. 그런 편협한 정파주의 감옥에 왜 내가 들어가야 하는가. 그럴 이유가 없다. 작가는 혼자 있는 놈이다. 내 편도 집단이 되면 ‘죄’를 만든다. 나는 단독자로서 내 문학을 할 뿐 패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패거리하고 어울릴 거면 정치를 하지, 왜 문학을 하는가.”

그는 자신에게도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 이데올로기란 첫째로 문학순정주의라고 말한다. 오로지 문학으로서만 발언하는 것이다. 언제나 자신이 작가라는 전지적 시점을 의식하고 견지하려고 노력한다. 둘째는 인간중심주의. 역사는 명분을 기록한 것이고 소설은 사람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기록한 것이다. 울고, 웃고, 화내는 내면세계를 기록하면 그게 소설이고 그걸 읽는 독자들은 궁극적으로 명분도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올해 대선이 있는데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이 뭐라고 보는가.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은 덕성(德性) 있는 지도자다. 공자는 덕이 있는 정치를 멀리서도 사람이 찾아오는 정치라 했지만 나는 덕성은 부동심(不動心)이라고 본다. 하지만 덕만 있으면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밖에 더 되겠는가. 따라서 대통령은 개별 사안에 흔들리지 않고 미래에 우리 국민이 나아갈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덕성을 갖추고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과묵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명지대 교수로서 오랫동안 학생을 가르쳤는데 요즘 20대들 정말 힘든가.

“현상적 삶으로 보면 ‘힘들다’는 아이들의 불평은 엄살이다. 우리 젊을 때는 끼니가 걱정이었다. 지금 젊은이들이 고통스러운 것은 자본주의가 가르쳐준 삶의 방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소비 욕망에 물든 아이들은 쇼윈도로 가득한 길을 걸어가는 것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세상이 그렇게 가고 있는데 아이들은 그 트렌드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준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표가 없는 아이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뒤엎을 수는 없다.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갖도록 해 내부에서 오는 신호를 수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효율성만 강조하는 지금의 대학교육은 이것을 제공하기는커녕 훼방만 놓고 있는 꼴이다.”

작가는 ‘은교’에 대한 영감이 떠오른 후 한 달 반 기간에 폭풍우처럼 써내려갔다. 그는 지금 내부에서 오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다음 작품에 대한 영감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고향 충남 논산으로 낙향해 살면서 서울 집을 왔다 갔다 하는 그는 최근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논산일기 2011 겨울’이라는 산문집을 펴냈다. 그가 애태우며 기다리는 것은 소설이 아니었다. ‘내 인생 마지막 승부는 은교가 아니야. 그냥 사랑이야. 얻고 싶은 것도 그뿐. 사랑보다 큰 권력은 경험하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5월 7일 박범신 트위터에서) 그는 불멸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청춘이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박범신#소설가#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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