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주 충돌사고, 감전주민 구한 경찰도 끝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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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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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경찰서 배근성 경사, 주민 부축하다가 감전사

3일 근무 때문에 두 아들의 유치원 재롱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배근성 경사(43·사진). 큰아들의 마지막 유치원 재롱잔치였기에 꼭 참석하려고 했지만 동료들 모두 사정이 있어 근무를 바꾸지 못했다. 행사장에 오지 못한 아빠를 만나기 위해 두 아들은 이날 오후 엄마와 함께 아빠가 근무하는 파출소를 찾았다. 그는 재롱잔치에서 뽐낸 동작을 자랑하는 아들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봤다. 그러고는 ‘큰아들의 내년 봄 초등학교 입학식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하지만 배 경사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

4일 오후 강원 화천군 하남면 화천장례식장 1호실에는 이 약속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화천경찰서 상서파출소 배 경사의 빈소가 마련됐다. 울다 지쳐 탈진한 아내(40)는 장례식장에 마련된 유족 휴게실에서 링거주사를 맞고 있었다. 빈소를 지킨 동생 근배 씨(40)는 “일주일 전 형제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를 했는데 그게 형과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며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동생들을 잘 챙기던 형의 사고 소식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교 선배인 김모 씨(44)는 “며칠 전 만났을 때 9일 동문회에서 꼭 보기로 약속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배 경사는 기온이 뚝 떨어져 인적도 끊긴 이날 오전 1시 반경 화천군 상서면 파포리 461지방도 농기계 창고 앞으로 출동했다. 이 마을에 사는 이모 씨(35·여)가 몰던 그랜저TG 승용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전신주를 들이받았고 이 이 사고로 승용차 범퍼 등 차량 앞부분이 파손됐다. 그러나 다행히 이 씨는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다.

이 씨는 같은 마을에 사는 친척 정모 씨(45)에게 전화를 해 도움을 요청했고 정 씨는 동생(29)과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또 이곳을 지나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한 운전자의 신고를 받고 배 경사도 사고 현장에 출동했다.

배 경사는 노련미를 살려 사고로 놀란 운전자 이 씨부터 진정시킨 뒤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사고 현장 주변에 떨어진 범퍼 조각을 줍던 정 씨가 갑자기 ‘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이 모습을 본 배 경사는 뭔가 위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해 정 씨를 구하기 위해 다가가 그를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배 경사도 신음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이들 옆에는 끊어진 전선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다.

배 경사와 정 씨는 곧바로 인근 화천의료원으로 옮겨졌지만 배 경사는 이미 현장에서 숨진 상태였다.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정 씨는 서울한강성심병원으로 다시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에 따르면 사고 당시 이 일대는 비가 내려 도로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안개도 자욱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화천경찰서 관계자는 “교통사고 충격으로 전신주와 연결된 3개의 전선 가운데 1개(약 지름 2.5cm)가 끊어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져 1만3800V의 고압전기가 흐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3형제 중 장남인 배 경사는 강원대 축산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9년 경찰에 입문했다. 지금까지 화천경찰서에서 형사계와 파출소 등을 번갈아가며 외근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올 2월 상서파출소로 발령받았다.

175cm의 키에 85kg으로 다부진 체격의 그는 형사계 근무 당시 항상 경찰에 대한 자부심을 강조했다고 동료들은 입을 모았다. 후배인 황철근 경장은 “평소 ‘나는 경찰이 천직이다’라는 말을 자주할 정도로 직업에 자부심이 큰 선배였다”고 말했다.

상서파출소 직원 7명 가운데 계급과 나이가 중간 정도였던 고인은 항상 파출소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고 모든 일에 솔선수범한 모범 경찰관이었다. 조재형 파출소장은 “다른 직원들이 혹시라도 힘들어할까 봐 사고가 난 날처럼 112 신고가 들어오면 항상 먼저 현장에 출동했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지난해 ‘경찰의 날’에 범인검거 유공 등을 인정받아 경찰청장상을 수상하는 등 지금까지 10차례 수상 기록을 남겼다. 그는 어머니(63)를 극진히 봉양했고 7세, 5세인 두 아들의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동료들은 전했다. 배 경사의 아내는 화천군 공무원이다. 배 경사의 영결식은 6일 오전 9시 반 화천경찰서에서 경찰서장(葬)으로 엄수된다. 그는 7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정부는 배 경사를 일계급 특진시키고 훈장도 추서하기로 했다.

화천=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장기우 기자 straw8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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