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SCHOOL DIARY]어느 지방 초등생과 학부모의 대치동 유학생활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30일 03시 00분


상위권인 줄 알았는데… 레벨테스트 결과 ‘fail’
엄청난 양의 숙제, 엄마까지 나서야 겨우 해결

《오후 10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는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학생과 자녀를 태우러 나온 부모의 승용차로 전쟁이다. 대치동 주민은 이를 보며 방학특강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방학 때 대치동으로 ‘단기유학’ 오는 지방학생의 이야기는 새롭지 않다. 3, 4년 전 전국 단위로 학생을 선발하는 자립형사립고(자사고)와 외국어고가 최고의 주가를 올릴 땐 특목고 입시준비를 위한 중학생과 학부모로 대치동은 들끓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직후 논술을 대비하기 위한 지방 고교생의 ‘대치동 행(行)’도 익숙했다. 요즘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대치동 유학생의 학령이 부쩍 낮아졌다는 것.

최근 방학을 맞아 대치동을 찾아 지방에서 온 상위권 초등생과 학부모가 부쩍 늘었다. 이들은 왜 대치동을 택했을까. 이들이 보낸 대치동의 여름은 어떤 풍경일까. 지방의 한 광역시에 남편과 중2 아들을 남겨둔 채 지난 방학 5주를 초등 5학년 딸과 함께 대치동 한복판에서 보낸 한 어머니가 전하는 ‘대치동의 여름’을 들여다보자.》
○ ‘학원도 ‘fail’이라니’… 대치동 24시

여름방학,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는 ‘거대한 기숙사’가 된다. 자신의 수준을 가늠하고픈 상위권 지방학생과 학부모로 북적인다. 동아일보 DB
여름방학,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는 ‘거대한 기숙사’가 된다. 자신의 수준을 가늠하고픈 상위권 지방학생과 학부모로 북적인다. 동아일보 DB
8일 오전 8시. A 씨(41)는 예치금 150만 원, 월세 150만 원을 주고 구한 12평 원룸에서 눈을 떴다.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고 딸을 깨웠다. 딸은 오전 9시 학원 영어수업 때 시험 볼 단어를 다 외우지 못했다. 오전 1시까지 A 씨가 직접 A4 용지에 정리한 단어 리스트를 빵과 함께 손에 쥐어줬다.

딸은 학교에서 영어만큼은 내로라하는 실력이고 시내 어학원에선 늘 최상위권 반에서 공부했다. 그런데 대치동 이른바 ‘톱3 학원’ 중 한 곳의 레벨테스트를 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100점 만점에 45점. 결과는 ‘fail(불합격)’이었다.

며칠을 딸에게 말을 못하다가 ‘톱3’는 아니지만 일대 인기가 높은 학원으로 갈아탔다. “입학시험은 통과하기 어려운 실력이지만 내신성적이 전교 최상위권이기 때문에 성실성을 믿고 맡는다”는 원장의 말을 듣고 등록할 수 있었다. 딸과 같은 반에는 외국에 최소 1년 이상 살다온 학생이 절반이 넘었다.

끊임없이 단어를 외워도 지난 수업 때 국어, 사회, 과학 등 미국 교과서로 배운 수백 단어와 별도 교재에 있는 단어 100개를 이틀 만에 외우기란 역부족. 결국 A 씨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학원까지 딸을 차로 데려다준 뒤 강의실까지 함께 올라갔다. 수업시작 직전까지 딸 옆에 앉아 A4 용지 속 단어를 물어봐줬다. A 씨는 “영어는 레벨이 비슷한 학생들과 수업을 들으면 실력이 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치동을 선택했다”면서 “깐깐한 레벨테스트를 통과해 수준이 되는 학생끼리 한 반이 되어서인지 수업 때 프리토킹이 가능한 것이 지방과는 다른 점”이라고 말했다.

낮 12시. 오전 수업이 끝나면 수학수업까지 1시간 여유가 있다. 대치동의 점심 풍경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엄마가 싸온 도시락을 차에서 먹는 ‘토종 대치동 초등생’, 혼자 햄버거나 편의점 김밥을 먹는 ‘토종 대치동 중고생’, 주방도구가 없는 원룸에서 지내기에 도시락을 쌀 수 없어 자녀를 데리고 인근 돈가스집이나 분식집을 찾는 ‘대치동 유학생과 학부모’가 그것이다.

A 씨는 점심을 먹여 딸을 수학학원에 들여보냈다. 딸은 지역교육청 영재교육원에 다닐 만큼 수학과 과학을 잘하는 편. 하지만 방학 동안 수학의 ‘도형’ 파트를 완성하기 위해 대치동 특강을 택했다. ‘도형 파트는 감각 있는 강사에게 배워야 한다’는 선배맘의 조언을 듣고 공간 감각이 떨어지는 딸이 방학 동안 도형을 확실하게 공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3시간 수업을 마치면 저녁 시간. 사온 도시락으로 딸과 차 안에서 저녁을 때웠다. 월, 수, 금요일은 영어 디베이트 특강까지 시간이 조금 남기 때문에 딸은 뒷좌석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화, 목요일은 수업이 없어 원룸으로 돌아와 자정까지 영어학원 숙제에 ‘올인(다걸기)’한다.

○ ‘전국구 대치동’에서 내 아이의 실력은?

A 씨가 초등생 딸의 대치동 유학을 선택한 이유는 세 가지. 우선 지방에선 상위권인 딸의 실력이 ‘전국구’로 불리는 대치동에서도 인정받는지 궁금해서다. 실제로 대치동엔 6개월에 한 번씩 학원 레벨테스트만을 보기위해 올라오는 지방학생과 학부모가 적잖다. 대치동에서 초중학생 대상 어학원을 운영하는 김모 원장은 “강원 춘천, 충북 음성, 대구, 울산 등지 학부모가 매달 실시하는 레벨테스트를 한두 달 전부터 예약한다”면서 “대치동 학생들과 자녀의 수준을 비교하려는 학부모가 많다”고 전했다.

본격적인 입시전쟁에 돌입하기 전 ‘빡센’ 경험을 통해 자녀를 관리하려는 학부모도 대치동으로 향한다. 대치동 학원은 수업시간의 두 배는 쏟아야 할 만큼 많은 양의 숙제를 내주는 것이 특징.

A 씨는 “딸이 다닌 영어학원에선 매 수업을 마치고 미국 역사교과서 10∼20장을 읽고 요약하는 숙제, 세포분열 염색체 다운증후군 같은 과학용어를 외우는 과학숙제, 듣기 CD를 듣고 받아쓰는 숙제, 200쪽짜리 책을 읽고 온라인상에서 북 리포트를 쓰는 숙제를 내줬다”면서 “숙제를 기반으로 한 시험을 못 보면 반 레벨이 떨어지므로 숙제를 도와주는 ‘새끼과외강사’를 둔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직접 해보니 엄마까지 나서야 할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수업 관리도 철저하다. 대치동 일대에 물난리가 났던 지난달 27일. 학원에서 ‘휴강문자’가 올 거란 A 씨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그는 “비가 쏟아져도 학원은 정상수업을 한다는 문자를 오전 8시 20분에 받고 깜짝 놀랐다”면서 “학원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가 숙제가 미흡합니다’ ‘○○학생이 시험 통과 못 했습니다’ 등의 문자가 오고, 오후 1시 수업이 끝난 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초등생을 오후 10시까지 남겨 보충을 시키는 것이 대치동”이라고 말했다.

봉아름 기자 er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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