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통]“죽도록 일만 시켜 미안”… 황순이에게 마지막 禮를 갖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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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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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매 키워준 집안의 보물24년 동고동락 암소 죽자 노부부, 장례 치르고 비석…‘함께한 세월과 情을 묻다’

암소 황순이가 생전에 주인 신옥진 씨와 함께 밭을 가는 모습. 전남 강진군 제공
암소 황순이가 생전에 주인 신옥진 씨와 함께 밭을 가는 모습. 전남 강진군 제공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도 지냈는데 황순이가 자꾸 꿈에 보이네요.”

전남 강진군 군동면 명암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신옥진 씨(69) 집 옆에는 40cm 높이의 작은 무덤이 있다. 무덤에는 신 씨와 24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암소 ‘황순이’가 묻혀 있다. 황순이는 7일 오전 숨졌다. 3년 전부터 살이 빠지고 발을 저는 등 건강이 좋지 않더니 지난달 12일 구제역 2차 백신 접종 주사를 맞은 뒤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수의사를 불러 몸에 좋다는 영양제를 놓아주고 밤낮으로 보살폈지만 허사였다.

신 씨는 다음 날인 8일 장례를 치렀다. 군동면장과 강진군 축산팀 관계자들이 ‘조문’을 왔다. 동네사람들도 잠시 일손을 놓고 찾아와 황순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신 씨는 집에서 10m 정도 떨어진 밭에 황순이를 묻은 뒤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장례를 치른 지 3일째 되는 날에는 황순이가 평소 좋아하던 사료를 놓아두고 ‘삼우제’를 지냈다. 신 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황순이 무덤부터 살핀다. 혹시 개나 살쾡이가 무덤을 파헤치지 않았나 싶어서다.

신 씨가 황순이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7년. 강진읍 우시장에서 당시 일곱 살이던 암소를 43만 원에 샀다. 신 씨는 “처음 본 순간 유난히 눈이 크고 동글동글해 다른 소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며 “하도 맘에 들어 6만 원을 더 얹어주고 샀다”고 회고했다.

말썽을 피우지 않고 주인을 잘 따르는 순한 성격을 보고 ‘황순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황순이는 그동안 암수 8마리씩 모두 16마리의 새끼를 낳아 집안 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2남 2녀 중 큰딸을 제외한 3명을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둘은 호주에 유학까지 보냈다. 황순이는 4남매를 가르치고 결혼시킬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준 집안의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황순이는 3년 전까지만 해도 1만3200m²(약 4000평)의 넓은 밭을 척척 갈아엎었다. 신 씨의 밭은 경지정리가 된 논으로 둘러싸여 농기계를 이용해 밭갈이를 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보통 소의 평균 수명은 20년이지만 황순이는 여느 소와는 달리 건강하게 31년을 살았다. 신 씨의 부인 이애심 씨(65)는 “평생 고생만 시킨 황순이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선물이 집 옆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는 것밖에 없었다”며 울먹였다.

강진군은 ‘워낭소리’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황순이의 넋을 달래기 위해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주기로 했다. 비석에는 ‘서른한 해를 일소로 살다 굴레를 벗은 황순이 이곳에 잠들다. 1980년 3월부터 2011년 3월 7일. 신옥진 가족 그 정을 함께 묻다’라는 글귀를 새기기로 했다.

강진=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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