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공존을 향해/3부]<2>음악으로 희망 찾는 아이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월 29일 03시 00분


부모 이혼에… 어려운 살림에… 입도 마음도 닫았던 아이들
“넌 할 수 있어” 악기 가르치자 “난 할 수 있다” 입가에 미소가

예술은 힘이다. 용기와 자신감을 통해 가난과 역경을 헤쳐나가게 하는 힘이다. 한국형 엘 시스테마를 꿈꾸는 서울 구로구 우리동네오케스트라의 오디션 현장(21일 서울 구로구 구로아트밸리 지하 2층 연습실). 바이올린을 꽉 쥔 소녀의 손끝에서 어려움을 딛고 꿈을 이루려는 의지가 보인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예술은 힘이다. 용기와 자신감을 통해 가난과 역경을 헤쳐나가게 하는 힘이다. 한국형 엘 시스테마를 꿈꾸는 서울 구로구 우리동네오케스트라의 오디션 현장(21일 서울 구로구 구로아트밸리 지하 2층 연습실). 바이올린을 꽉 쥔 소녀의 손끝에서 어려움을 딛고 꿈을 이루려는 의지가 보인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너처럼 연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

“활을 약간만 더 세게 잡아 봐. 자신감을 갖고 좀 크게 연주하면 금방 좋아질 거야.”

21일 오후 2시 서울 구로구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의 지하 2층 연습실. 아이들은 친구들의 바이올린과 첼로 연주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한 아이가 연주하던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끝나자 다른 쪽에 있던 아이가 파가니니의 ‘요정의 춤’을 연주하는 선율이 연습장을 가득 메웠다.

‘우리동네오케스트라’ 단원들이 8개월간 갈고닦은 실력을 테스트하는 오디션이 열린 날. 오디션 차례가 임박한 한 아이가 “연습을 별로 하지 않아 떨린다”고 말하자 운영 매니저인 서울시립교향악단 문화사업팀의 김종현 과장은 “넌 꾸준히 연습을 했으니까 이번에도 잘할 거야”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동네오케스트라는 지난해 5월 서울시의 지원 아래 만들어진 어린이 오케스트라다. 첫 시범구로 선정된 구로구의 기초수급대상자 및 차상위계층, 다문화가정 등의 초등학교 3학년 30여 명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지도는 서울시향의 베테랑 연주자 5명이 맡았다.
○ ‘아이 캔 두 잇(I can do it)’

지난해 5월 첫 교육이 시작됐을 때 혁준이(가명)는 연습시간 도중 10여 분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친구들을 때리거나 못살게 구는 일도 잦았다. “다른 친구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악기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선생님의 지적에 혁준이는 요즘 제일 먼저 연습실에 와서는 악보대를 옮겨 연습 대형을 만든다. 늦게 오는 친구를 위해 악보를 미리 꺼내 놓기도 한다.

부모의 이혼과 어려운 가정형편 등으로 타인을 경계하거나 열등감에 젖어 있던 아이들은 밝고 긍정적으로 변해 갔다. 구석에 앉아 항상 말이 없던 미연이(가명)는 수다쟁이가 됐다. 평소 미연이가 너무 말이 없다며 걱정하던 미연이 아빠는 “아이가 집에 오면 오케스트라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며 즐거워한다.

부족해 보이던 아이들이 오히려 선생님들에게 용기를 주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첫 공연을 앞두고 초초해하는 선생님들에게 아이들은 ‘아이 캔 두 잇’이라는 구호를 만들어 연습 때마다 외치자고 먼저 제안했다.

○ 한국형 ‘엘 시스테마’


우리동네오케스트라는 2009년 서울시가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음악교육을 지원해 보자는 제안에 따라 시작됐다. 첫해는 성공한 음악교육 모델로 자리 잡은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운동을 한국 상황에 맞게 변형시킬 수 있는지를 두고 고민했다.

우리동네오케스트라 역시 엘 시스테마 모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개인 중심이 아닌 5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교육이 진행된다. 아이들은 집단 속에서 음악뿐 아니라 협동하는 자세도 자연스럽게 배운다. 매번 연습을 할 때는 10여 분간 예절교육이 이뤄진다. 우리동네오케스트라의 총책임자인 서울시향 김영훈 음악감독은 “엘 시스테마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음악을 통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다는 본질적인 목표는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 ‘작은 성취’의 효과


“연습을 많이 했구나. 실력이 많이 늘었네.”

이날 오디션 때문에 초조해하던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칭찬에 환하게 웃었다. 악보와 첼로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연주하던 한 아이는 “틀려도 폼 나게 틀리자”라며 기운을 북돋아 주는 선생님들의 격려에 활을 고쳐 잡았다.

우리동네오케스트라 아이들의 신체 정서적 변화를 측정하고 있는 이화여대 정익중 교수(사회복지학)는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 아무것도 안 될 거라는 느낌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일”이라며 “아이들은 작은 음악적 성취를 통해 스스로에 대한 존중감을 키우고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 ‘한국형 엘 시스테마’ 성공하려면… ▼
연례행사식 지원으론 실패… 교사수준 높이고 아동 자발적 참여 이끌어야


세계적으로 ‘엘 시스테마’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한국에서도 우리동네오케스트라와 같은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음악 프로그램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은 소외계층 아이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꿈과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세종 꿈나무 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운영한다. 2008년부터 보건복지부는 정서 발달에 어려움을 겪는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클래식 악기를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 지난해 엘 시스테마 창설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제10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교육과학기술부는 한국형 엘 시스테마를 도입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외국의 성공 사례를 무조건 모방하기보다는 한국 상황에 맞게 변형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엘 시스테마 운동의 경우 다양한 인종에게 음악 교육을 함으로써 미국 사회를 진정한 ‘멜팅 폿(melting pot·용광로)’으로 만들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세웠다. 예산 역시 정부가 아닌 민간 주도로 운영된다.

지속적인 활동에 필요한 예산이 확보되지 않았고, 단계별 수준별 오케스트라도 마땅치 않은 국내 현실에서 아이들에게 목표를 갖고 열심히 연습하도록 독려하기는 쉽지 않다.

서울시향의 김영훈 감독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클래식 악기 레슨을 받을 수 있는 바우처를 몇 장씩 준다거나, 1년 단위로 평가하고 지원하겠다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화여대 정익중 교수(사회복지학)도 “짧은 기간에 아이들의 정서적 변화를 객관적인 수치로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며 “긴 호흡으로 변화를 관찰하고 이를 토대로 정책 수립에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음악 교사들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도 한국형 엘 시스테마가 정착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의 경우, 지도 교사만 1만5000여 명에 이른다.

부모의 관심이 부족한 저소득층 아이들이 꾸준히 교육에 참가할 수 있도록 지역 내의 사회복지사 등이 역할을 해줘야 프로그램이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성호 교수는 교육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의지도 강조한다. 엘 시스테마가 영재 음악인을 키우려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참여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성과를 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개별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한국형 엘 시스테마 음악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일시적인 정책 홍보 수단으로 변질된다면 교육의 지속성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교육계의 한 관계자는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운동은 정치색을 배제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정권이 일곱 차례나 바뀌는 혼돈 속에서도 지속적인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 엘 시스테마 ::

엘 시스테마 사업은 1975년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빈곤층 아이들에게 무료로 악기를 나눠주고 연주를 가르친 데서 시작됐다. 35년이 흐른 현재 전국에 200개가 넘는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운영되고 있으며 약 30만 명의 청소년이 거쳐 갔다. 음악을 통해 아이들에게 삶의 목표를 갖게 하고, 그들을 폭력과 범죄에서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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