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코리안 건설현장 지휘
외국인 조리사 삼겹살 굽고 가사도우미 고용 ‘귀족’ 생활
인터넷으로 가족과 화상대화…젊은층 꺼려 ‘신화’ 끊길우려
오만 두쿰 시 대우건설의 수리조선소 현장에 들어선 사막골프장. 한국인 근로자가 파키스탄 남성 캐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티샷을 하고 있다. 두쿰(오만)=황형준 기자
1970, 80년대 중동 건설현장의 한국인이라면 으레 뜨거운 태양 아래서 구슬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이미지였다. 연장을 쥔 손에는 항상 굳은살이 박여있고 얼굴은 햇빛에 까맣게 그을렸으며 작업복은 온통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지난달 15∼20일 오만과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에 진출한 한국 건설업체들의 현장을 둘러본 결과 한국 근로자들의 생활상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세계무대에서 급부상한 한국 경제의 위상이 ‘해외건설 역군’들의 삶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 사막 위의 골프, 외국인 조리사
“나이스 샷.”
1970, 80년대 해외 건설현장의 한국인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힘들게 일하며 외화를 벌었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도약으로 이제 중동의 한국인들은 주로 현장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지난달 19일 오만 두쿰 시의 대우건설 수리조선소 현장. 수도 무스카트에서 동남쪽으로 500km 떨어진 이곳에서 9홀 골프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막 위에 지은 것이라 숲이나 호수 같은 해저드(골프코스의 장애물)는 없지만 현장 근로자인 한국인 골퍼들은 인조잔디가 붙은 패드를 모래 위에 깔고 제법 그럴싸하게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이들의 옆에선 건장한 파키스탄 출신 남자 캐디가 클럽을 날랐다. 이곳에서 만난 한 한국인 근로자는 “주말이면 날씨가 선선한 오전 시간을 이용해 사막 골프를 즐긴다”고 말했다.
이들이 숙소로 쓰는 곳은 컨테이너를 연결해 만든 조립식 건물. 식당에서는 한국인 주방장 1명이 외국인 조리사들을 지휘해 중동에서 먹기 어려운 된장찌개, 육개장, 삼겹살 등 한식을 내놓는다. 식재료는 매달 컨테이너선으로 한국에서 직접 조달한다. 직원들은 쉬는 시간엔 화상 메신저를 통해 가족들과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하거나 인터넷전화로 통화한다.
한국인이 일하는 대부분의 외국 건설현장에는 골프연습장과 헬스클럽이 마련돼 있다.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의 GS건설 직원 숙소에는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스크린골프장 시설이 4개나 들어서 있다.
○ 건설현장의 노동자에서 관리인으로
대우건설 두쿰 현장의 근로인력 2252명 가운데 한국인은 103명으로 4.6%에 불과하다. 조기석 두쿰 수리조선소 현장소장은 “과거 우리 선배들은 그야말로 ‘노동’을 했지만 이제는 소수의 한국인이 전체 현장을 지휘하고 있다”며 “그만큼 한국의 국격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이곳뿐 아니라 대부분의 중동 건설현장에서는 한국인이 파키스탄과 필리핀, 방글라데시 등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숙소에서는 ‘하우스 보이’ ‘오피스 보이’로 불리는 외국인 남성 가사도우미들이 빨래, 요리, 기타 심부름 등을 한다. 대우건설의 한 현장 간부는 “4개월에 한번씩 2주간 한국으로 휴가를 가서 집에서 쉬고 있으면 아내가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도와달라고 하기도 한다”며 “오히려 이곳에서는 가사도우미 덕분에 귀족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운전기사로 일하는 파키스탄인 누르 아만 씨(30)는 “매달 700달러를 벌고 있는데 고향에서는 이 정도면 엄청난 고소득”이라고 말했다.
한국인들의 현지 근무여건이 나아진 것은 바람직하지만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국인들이 실무보다 관리직종에 주로 종사하다 보니 현장에서는 경험과 기술을 겸비한 건설엔지니어들의 대(代)가 끊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요즘 중동이나 아프리카 건설현장에서 가장 악착같이 일한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젊은 기술인력이 오지 근무를 꺼리는 경향과도 무관치 않다. 아부다비 건설현장 관계자는 “젊은 엔지니어들이 중동 근무를 선호하지 않아 현장이 고령화되고 있다”며 “청년 인력을 양성하지 않으면 기술과 경험의 전수가 끊겨 ‘건설 한국’의 신화가 막을 내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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