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金의 전쟁’ 뒤로하고… ‘재일동포 차별’에 맞섰던 권희로 씨 82세로 별세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27일 03시 00분


“조센진” 욕설 야쿠자 살해
1968년 88시간 인질극 벌여
99년 귀국뒤에도 기구한 삶
영도 앞바다-日 어머니 묘 옆
“유골 절반씩 뿌려달라” 유언

일본에서 ‘재일교포 차별 철폐’를 부르짖으며 야쿠자 조직원을 살해하고 무기수로 복역했던 권희로 씨가 1999년 가석방된 뒤 부산 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당시 권 씨는 1998년 작고한 어머니 박득숙 씨의 유해를 안고 입국했다(왼쪽). 오른쪽은 1968년 일본 시즈오카 현의 한 온천여관에서 투숙객 13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던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본에서 ‘재일교포 차별 철폐’를 부르짖으며 야쿠자 조직원을 살해하고 무기수로 복역했던 권희로 씨가 1999년 가석방된 뒤 부산 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당시 권 씨는 1998년 작고한 어머니 박득숙 씨의 유해를 안고 입국했다(왼쪽). 오른쪽은 1968년 일본 시즈오카 현의 한 온천여관에서 투숙객 13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던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본에서 야쿠자를 살해한 뒤 무기수로 복역하다 영구 귀국한 권희로 씨가 26일 오전 6시 50분경 부산 동래구 봉생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2세. 그의 인생역정은 한일 간 질곡의 역사만큼 파란만장했다.

○ 야쿠자에 총구 들이댔던 사건은?

권 씨를 일본 사법사상 최장기 복역수로 만든 사건은 살인과 인질극이었다. 이 사건은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이 단초가 됐다. 권 씨는 1968년 2월 20일 채권자의 부탁으로 빚 독촉을 하던 일본 폭력배 2명을 시즈오카(靜岡) 현 시미즈(淸水) 시의 클럽 밍크스에서 엽총으로 사살했다. 폭력배가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하자 격분한 것.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권 씨는 실탄과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차량을 이용해 도주했다. 시즈오카 현 혼카와네(本川根)의 한 온천여관에 들어간 그는 투숙객 13명을 붙잡고 88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이다 체포됐다. 1972년 1심, 1974년 2심을 거쳐 1975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인질극을 지켜보던 어머니 박득숙 씨(1998년 작고)는 아들에게 한복 한 벌을 건네준 뒤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깨끗이 자결하라”며 자신도 비장한 각오를 보인 바 있다.

○ 생전 “어머니 묘소에 절 올리고 싶다”

권 씨는 1928년 11월 일본 시즈오카 현 시미즈 시에서 권명술 씨와 박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권 씨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재혼했다. 의붓아버지의 구박에 견디다 못해 열세 살 때 가출했다. 일본 사회로부터 천대를 받다 보니 형무소를 들락거리며 청춘을 보냈다. 결혼에도, 사업에도 잇따라 실패했다. 일본인에게서 빌린 돈이 무기수로 장기 복역하게 된 화근이었다. 그는 1999년 9월 귀국하기까지 총 31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980년대 후반 부산 자비사 박삼중 스님과 재일동포 실업가 조만길 씨 등을 중심으로 권 씨 가석방운동이 시작됐다. 박 스님 등은 한국인 10만 명이 서명한 석방탄원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 이런 구명운동 덕분에 1999년 9월 7일 ‘일본에 다시 입국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가석방돼 영구 귀국했다.

한국 땅을 밟은 권 씨는 박 스님 등 후원인들의 도움으로 부산 연제구 거제동 한 아파트에 정착해 사회활동을 했다. 1979년 일본에서 옥중 결혼했던 한 여인과 함께 가정을 꾸려 안정된 노년을 보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여인이 돈을 갖고 달아나면서 다른 여인과의 관계 등으로 형사사건에 연루돼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치료감호소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지병인 전립샘암이 악화되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이달 초 일본 언론에 “죽기 전에 어머니의 묘에 절을 올리고 싶다”며 일본 입국을 희망했다. 권 씨는 최근 자신의 석방운동을 주도한 박 스님에게 “시신을 화장해 유골의 반은 선친의 고향인 부산 영도 앞바다에, 반은 시즈오카 현 어머니 묘 옆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서 이발관을 운영하다 일본인을 상대로 탄원서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권 씨의 석방에 앞장섰던 전 후원회장 이재현 씨는 이날 소식을 듣고 “(권) 선생님은 나라 사랑과 그리움이 엄청났던 분”이라며 비통해했다.

권 씨의 시신은 28일 오전 8시 반 발인에 이어 부산영락공원에서 화장된다. 유골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처리될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는 부산 동래구 봉생병원에 마련됐다. 051-531-7100

부산=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 아사히 “차별 부각시킨 인물” 日 언론들도 비중 있게 보도 ▼

일본 언론도 권희로 씨 사망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아사히신문은 26일 석간에서 “재일동포 2세인 그는 사건 당시 언론에 ‘사건의 배경에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 문제가 있다’고 호소했다. 한국에선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고 일부에선 ‘차별과 싸운 영웅’이란 평가도 있다”고 전했다. 아사히신문은 “한일병합 100년인 해에 숨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징적이다”라는 재일동포 2세 강상중 도쿄대 교수의 말을 실었다. 요미우리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은 1968년 사건 당시 인질의 한 사람이었던 여관 주인 모치즈키 에이코(望月英子·71) 씨의 반응을 전했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김의 전쟁

1992년 배우 유인촌(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주연한 영화. 권희로 씨 사건을 스크린에 담은 이 영화는 재일교포의 인권문제에 대한 반향을 일으켜 권 씨의 모국 송환의 도화선이 됐다. 영화에서 권희로가 아닌 김희로로 묘사된 것은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김 씨 성을 가진 남성과 재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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