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漢字박사님〓工夫박사님”

  • 동아일보

“한자와 친해진 뒤 독서도 글쓰기도 개념이해도 술술∼”
국가공인 2급… 3급… 어른 뺨치는 초등생 한자도사들

《“선생님, 눈이 아플 땐 왜 그냥 ‘병원’이 아니라 ‘안과’에 가나요?”

“선생님, 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나요? 사기는 범죄 아닌가요?”

수업시간에 이런 식의 엉뚱한 질문을 던져 선생님을 당황하게 하는 초등학생이 적지 않다. ‘분수(分數)’ ‘소화(消火)’처럼 한자어로 된 개념이 많이 등장하는 수학, 과학 수업시간은 아예 한자어 뜻풀이 시간이 되기도 한다.

‘다각형(多角形)’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앉아있던 아이들도 “뿔(角)이 많은 모양(形)”이라고 설명해주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단어의 뜻을 몰라 문제를 못 풀겠다”며 시험시간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학생도 부지기수다.

이런 학생들의 문제는 뭘까. 바로 ‘한자(漢字)’다.》

우리말 어휘의 70%를 차지하는 한자는 학생들에게 교과내용의 이해를 돕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평행사변형’ ‘입법’처럼 한자어로 된 개념과 용어를 배울 때 한자의 뜻을 알면 학생들은 그 의미와 원리를 더 쉽고 빠르게 이해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턴 ‘선상지(扇狀地·강에 의해 운반된 자갈이나 모래가 퇴적돼 만들어진 부채 모양의 지형)’ ‘관혼상제(冠婚喪祭)’처럼 한자를 모르면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용어가 대거 등장해 한자실력이 성적을 좌우하기도 한다. 한자를 아는 학생은 용어와 개념을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은 달달 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올해 3월 국가공인 2급(상용한자 및 인명 지명용 한자 포함 총 2355자) 한자능력급수증을 딴 경기 고양시 용현초등학교 3학년 김지혁 군. 5세 때부터 매일 10∼15자의 한자를 꾸준히 익힌 김 군은 현재 평균 97점 이상의 성적을 유지한다.

김 군은 개념이나 용어의 뜻을 암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과학 책에서 ‘용해(溶解)’란 단어가 나오면 ‘흐를 용’ ‘풀 해’란 한자의 뜻을 조합해 ‘녹는다’는 의미를 끌어낸다. 책을 읽다 새로운 어휘나 개념을 발견하면 한자 뜻을 떠올린 다음 단어의 의미를 유추하고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 것. 이렇게 개념과 용어 자체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훈련을 하면 굳이 뜻과 의미를 암기하지 않아도 헷갈리거나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게 김 군의 설명이다.

올해 초 국가공인 준3급(상용한자 1500자) 한자시험을 통과한 광주 장덕초등학교 6학년 김여진 양은 예습을 할 때 단원명에 포함된 한자어로 학습내용을 유추한다. 사회의 ‘우리 생활과 정치’란 단원을 예습할 땐 ‘정치’라는 한자어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일→대통령, 국회의원의 역할→민주주의, 선거’식으로 생각을 확장해 나간다. 그런 다음 교과서 본문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내용을 예측했나를 살펴본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학교수업을 들으면 훨씬 이해하기가 쉽다고 김 양은 말했다.

김 양이 한자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건 ‘나만의 사전’을 만들어 활용한 덕분이다. 김 양은 매주 책이나 신문의 사설을 읽고, 새로운 어휘가 나올 때마다 옥편을 찾아 단어의 뜻을 정확히 파악한다. 이렇게 익힌 어휘는 단어장에 한글과 한자어, 뜻과 음을 모두 적고 수시로 본다.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김 양은 중간·기말고사 국어시험에선 늘 100점을 맞는다.

김미화 서울 선정고등학교 한문교사는 “한자로 개념이나 용어의 뜻을 유추하다보면 사고력은 물론 교과전반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진다”면서 “한자를 알면 의미를 잘못 파악하거나 다른 개념과 헷갈려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학습효율도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넘어가지 않으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때 ‘학습장애’를 겪을 가능성도 있다. 책을 줄줄 읽고도 정작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는 학습장애는 ‘어휘력 결손’이 문제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자녀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학부모도 있다.

전북 전주시 송천초등학교 6학년 김덕환 군도 엄마 박승희 씨(39)의 지도에 따라 한자학습을 통해 어휘력을 키웠다. 학습능력을 키우는 데 독서와 어휘력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박 씨는 김 군이 5세 때 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박 씨는 김 군에게 가장 먼저 사람 ’인(人)’, 새 ‘을(乙)’ 같은 부수를 익히게 했다. 부수를 알면 한자의 뜻과 음을 예상할 수 있어 좀 더 쉽게 한자를 익힐 수 있기 때문. 김 군이 어느 정도 한자를 익힌 후엔 어휘력을 쌓기 위해 모양이 비슷한 한자, 의미가 같은 한자, 발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한자를 함께 묶어 공부하도록 했다.

박 씨는 “어휘력을 쌓으면 ‘병을 치료하는 사람’인 ‘의사(醫師)’와 ‘생각’을 뜻하는 ‘의사(意思)’처럼 동음이의어를 잘못 이해해 동문서답을 하거나 문제에 포함된 단어의 뜻을 몰라 답을 적지 못하는 문제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평균 98점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김 군의 별명은 ‘걸어 다니는 사전’이다. 2월 국가공인 한자 2급 시험을 통과한 김 군은 친구들이 과학교과서에 나오는 ‘수압(水壓)’의 뜻을 물으면 즉각 “물이 누르는 힘”이라고 답한다. 윤홍길의 ‘장마’, 정관용의 ‘꺼삐딴리’, 박완서의 ‘자전거 도둑’처럼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작품도 막힘없이 읽는다.

김 군은 “한자어, 고사성어를 꾸준히 익힌 덕분에 독서와 글쓰기 실력이 쌓인 것 같다”면서 “학교시험도 한문 덕을 톡톡히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혜진 기자 leehj0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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