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공부 올인 철석같이 믿었는데 PMP로 야동을…”

  • 입력 2009년 4월 14일 03시 01분


잘못 쓰면 독… ‘공부의 적’ 돌변하는 디지털 학습기기

“PMP로 50분짜리 인강(인터넷 강의)을 2배속으로 보면서 25분 만에 끝내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울 때가 많아요. 고 3 생활은 속도전이니까요. 그래도 PMP는 절대로 안 사요. 자투리시간까지 공부에 쓰겠다면서 PMP를 산 친구들 중에 실제론 ‘폐인’이 된 경우도 적지 않거든요.”

디지털 학습기기로 무장한 고 3 박모 군(18·경기 안양시). 화장실 안에서 ‘큰일’을 보면서도 전자사전에 내려받은 유명 강사의 인강을 듣고, 버스 안에선 MP3 플레이어에 미리 내려받아놓은 미국 CNN 뉴스를 청취한다.

박 군은 디지털기기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반드시 충고하는 두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PMP는 사지 말라는 것이며 둘째, MP3 플레이어는 듣기기능만 갖춘 것으로 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박 군의 전자사전은 DMB, 무선 인터넷 기능이 있는 최신 디지털기기들에 비해 그 기능이 ‘소박’한 수준이었다.

“디지털기기가 단순히 학습의 도구일까요? 아니에요. 제2의 컴퓨터이자 TV가 되기도 하지요. 웬만큼 자제력이 있는 애들도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픈 유혹에 흔들릴 때가 많아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감시망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첨단기능을 갖춘 디지털기기들은 게임기, DVD플레이어, 심지어 만화책으로도 돌변할 수 있다는 게 박 군의 설명이다.

디지털기기의 역습이다. ‘30만 원이나 주고 전자사전을 사줬으니 이젠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겠지’ 하고 부모가 안심하는 사이 아들은 학원에서 쉬는 시간에 전자사전으로 ‘아내의 유혹’(SBS 일일 드라마)을 열심히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책상 앞에 30분도 앉아 있지 못하던 자녀가 공부한다고 방에 들어간 지 몇 시간이 지나도 꼼짝하지 않고 버틴다면? 컴퓨터 게임을 몇 시간씩 해야 직성이 풀리는 자녀가 PMP를 구입한 뒤엔 컴퓨터 타령을 전혀 하질 않는다면? 부모는 다음 상황을 꼭 살펴봐야 한다.

|# 장면 1| 전자사전에 이어폰끼고 ‘꽃남’만 봐요

“이 요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시에 가방검사를 했다간 가뜩이나 예민한 아이와 말싸움만 하게 될 텐데….”

주부 정모 씨(40·서울 구로구 신도림동)는 1년 전 구입한 전자사전 때문에 속을 끓인다. 중 3인 딸이 전자사전을 TV로 악용하는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어 방에 들어가 봤더니 이어폰을 끼고 전자사전으로 ‘꽃남’(KBS 2 드라마 ‘꽃보다 남자’)을 열심히 보고 있지 뭐예요.”

정 씨를 더 경악하게 만든 건 딸의 필통 한 가득 들어있던 외장형 메모리카드였다.

“다그쳐 물었더니 친구 거라고 하더군요. 한국판 ‘꽃남’은 물론 대만, 일본판 ‘꽃남’까지 외장형 메모리카드에 전부 내려받아 공부시간에 몰래 돌려본대요.”

이 사건 이후 정 씨는 ‘전자사전 딜레마’에 빠졌다. 딸이 언제 어떻게 무슨 용도로 전자사전을 사용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기에 일단 압수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학교 영어수업시간 준비물”이란 딸의 말에 무턱대고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전자사전을 사주면 영어 100점 맞겠다는 딸의 약속을 철석 같이 믿었는데 이젠 배신감마저 들어요.” 정 씨의 하소연이다.

|# 장면 2| PMP로 만화-스포츠중계 보고 게임만

“PMP로 야동(‘야한 동영상’을 뜻하는 은어) 보다가 엄마한테 딱 걸렸어요.”

중 3 조모 군(16·부산 금정구)은 최근 겪은 ‘끔찍한 사고’를 회상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모님의 신뢰를 깨뜨렸다는 자책감이 컸기 때문이다.

“엄마가 우리 아들은 안 그럴 줄 알았다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 너무 죄송했어요. 친구들 때문에 딱 한 번 호기심으로 본 것뿐인데…. 다른 친구들처럼 PMP를 악용하지도 않았고요.”

그날 바로 PMP를 어머니에게 압수당했다는 조 군. 그는 참회의 심정으로 친구들의 ‘PMP 악용 사례’를 낱낱이 고발했다.

①독서=PMP 텍스트뷰어 기능으로 인터넷소설이나 만화를 내려받아 읽는다. 이어폰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 쉬는 시간, 점심시간은 물론 수업시간에도 애용된다.

②영화관람=온라인 강의를 보는 척하면서 미리 내려받은 최신 영화와 드라마를 본다. 부모나 학교 선생님이 눈치 채지 않도록 하는 연막작전이 필수.

③스포츠 게임 시청=DMB 수신 기능을 이용해 야구, 축구 경기는 물론 ‘국민 여동생’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생중계까지 독서실에서 시청한다.

⑤스트레스 해소=테트리스, 오목, 퍼즐 맞추기, 슈퍼마리오 같은 추억의 오락실 게임은 여기 다 모였다. 같은 기종의 PMP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 카페에 가면 다채로운 게임을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학교와 학원의 쉬는 시간이나 버스 속에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는 덴 최고.

|# 장면 3| MP3엔 다운받은 최신 유행곡이 빼곡

“록 음악을 너무 좋아해요. MP3플레이어를 켤 때만 해도 ‘딱 한 곡만 듣자’고 굳게 다짐하는데 한 곡을 듣고 나면 전원을 끌 수가 없죠. 한번 듣기 시작하면 30분은 기본이었어요. 고등학생이 되니까 이젠 저도 저를 알겠더라고요. 대학 가려고 아예 MP3를 끊었어요.”

고 2 윤모 양(18·경기 부천시)은 스스로 ‘MP3 플레이어 사용금지’ 처분을 내렸다. 유행가요를 듣는 데 낭비하는 시간도 만만찮았지만, 그 가요를 MP3플레이어에 담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버려야 했던 것. 인터넷에서 최신 유행곡을 검색하고, ‘미리듣기’ 기능을 통해 몇 소절을 미리 들어본 다음, 원하는 곡만 골라 내려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하루에도 많게는 한 시간에 가까웠다.

“노래도 중독이에요. 처음엔 자꾸만 MP3플레이어에 손이 가는 ‘금단증상’ 때문에 고생했어요. 올 초에 전자사전을 샀는데, 일부러 사전기능만 갖춘 걸로 구입했어요. 유혹은 이겨내는 것보다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최고예요.”

이혜진 기자 leehj08@donga.com

▼자녀의 디지털학습기기 악용 방지를 위한 TIP▼

○ 아직 디지털학습기기를 사주지 않은 부모라면

[1] 자녀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한다. 인터넷, 게임, TV 중독으로 고생 하는 자녀라면 디지털학습기기를 절대로 사주지 않는 것이 좋다.

[2] 자녀에게 꼭 필요한 디지털기기라면 기능이 한정된 것만 골라 사준다.

[3] 자녀가 디지털기기를 사달라고 떼를 쓴다면 왜 필요한지 그 이 유를 구체적으로 부모에게 설명하게 한다. 언제 어떻게 기기를 사용할 것인지 ‘사용계획서’를 작성하게 한다.

[4] 자녀와의 대화를 통해 사용규칙을 미리 정한다. 일주일에 한 번 또는 한 달에 한 번 디지털기기를 부모가 검사해도 좋다는 ‘동의 서’를 받아 놓는다.

○ 디지털학습기기를 이미 사 준 부모라면

[1] 자녀의 디지털기기에 어떤 기능이 있는지 사용설명서를 보며 꼼 꼼히 확인한다.

[2] 집 안에서만큼은 디지털기기를 사용하지 않도록 사용규칙을 정한다. 부모가 먼저 휴대전화 전원을 끄는 모범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

[3] 디지털기기를 언제, 어떻게 활용하는지 보고서를 작성해 부모에 게 주기적으로 제출하게 한다. 자녀 스스로 기기 사용을 통제할 수 있도록 자제력을 키우는 과정인 것. 강제성은 떨어질지라도 자녀의 양심에 호소해 보는 방법이다.

(도움말= 정미경 빨간펜 교육연구소 연구원, 양윤정 TMD교육연구소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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