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신고엔 뒷짐졌던 경찰, 대통령 질책 6시간만에 검거

  • 입력 2008년 4월 1일 02시 53분


사건 당일인 26일 오후 지하철 대화역에서 폐쇄회로(CC)TV에 잡힌 용의자 모습. 사진 제공 경찰청
사건 당일인 26일 오후 지하철 대화역에서 폐쇄회로(CC)TV에 잡힌 용의자 모습. 사진 제공 경찰청
■ ‘일산 어린이 납치 미수’ 용의자 체포

李대통령 경찰서 전격 방문 “이런 식 수사 안된다”

1000명 투입 수사… 결국 시민이 경찰 움직인 셈

“수서역 인근을 집중적으로 탐문 수사하던 중 이날 오후 8시 반경 수서역 부근 사우나에서 이 씨를 검거했습니다.”

경찰은 경기 고양시 대화동 S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A 양을 폭행한 이모(41) 씨를 31일 붙잡은 뒤 이렇게 말했다.

수사진의 노력을 부각시키는 듯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스스로 뛰지 않았다. 부모의 노력과 시민의 공분이 경찰을 움직이게 했다.

이 씨가 26일 A 양을 무자비하게 폭행했을 때 소녀를 구한 사람은 이 아파트의 같은 통로에 사는 여대생이었다.

이 여대생이 A 양의 비명을 듣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뛰어나가자 이 씨는 납치를 포기하고 황급히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사건 발생 직후 신고를 받은 지구대는 ‘술 취한 사람의 폭행’으로 판단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경기 일산경찰서 역시 일반적인 폭력 사건으로 취급했다.

범인은 흉기를 들고 있었다. A 양은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다쳤고 충격을 받았는데도 경찰은 엘리베이터의 폐쇄회로(CC)TV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A 양의 부모는 참다못해 범인의 모습을 담은 전단지를 직접 만들어 뿌렸다. 수사에 앞장서야 할 경찰은 오히려 “언론에 알리지 말라”고 부모에게 말했다.

이런 사실이 31일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시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사람이 죽거나 사고가 터진 뒤에야 제대로 움직이는 것이 경찰이냐.”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을 경찰이 알기나 하느냐.”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경찰 게시판에는 경찰의 한심한 자세와 대응을 질타하는 글이 하루 종일 올라왔다.

안양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혜진이와 예슬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발생한 사건이어서 시민들의 공분은 더욱 거셌다.

이명박 대통령은 31일 일산경찰서를 갑자기 방문했다. 대통령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어린 여아를 대상으로 한 것을 폭행사건으로 다룬다는 게 온당하냐. 이는 사건을 간단히 끝내려는 경찰의 (안이한) 조치다.”

대통령의 질책에 이기태 일산경찰서장은 “잘못했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경찰은 뒤늦게 1000여 명의 인원을 투입했다. 전단지 1만 장을 배포하면서 일산 지역에서 대대적인 탐문 수사에 나섰다.

용의자는 대통령이 돌아가고 나서 6시간 만에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사우나에서 붙잡혔다.

서울 강남지역의 한 형사과장은 “대통령이 일선 경찰서를 방문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용의자를 잡는 데 경찰이 수사력을 집중시킬 것이므로 쉽게 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예상처럼 용의자는 곧바로 경찰에 잡혔다. 경찰을 움직인 것은 대통령의 질책이었고, 대통령을 움직인 것은 시민의 공분이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 영상취재 : 정영준 동아닷컴 기자
▲ 영상취재 :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이번에도 ‘CCTV의 눈’은 못 피했다

숭례문 방화범 - 네모녀 살해범 이어 검거 일등 공신▼

폐쇄회로(CC)TV가 범인을 검거하는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31일 경기 일산 여자 초등학생 납치미수 사건의 용의자가 잡힌 결정적 계기는 지하철 수서역의 CCTV에 찍힌 용의자의 얼굴이었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수서역 주변을 탐문해 범인 이모 씨를 검거했다.

경찰은 지하철 CCTV에서 용의자와 인상착의, 걸음걸이가 비슷한 화면을 확보해 용의자의 소재 파악에 성공했다.

CCTV가 형사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일등공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최근 서울 마포구 창전동 네 모녀 피살사건에서도 범인 이호성 씨가 시신을 대형 여행가방에 나눠 나르는 장면과 시신을 유기한 뒤 피해자의 차량을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두는 장면이 CCTV에 잡혀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또 피해자 김 씨가 한 은행에서 예금 1억7000만 원을 인출하고 승용차 보조석에 타는 모습이 은행 CCTV에 잡힌 것은 범행동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지난달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보존회장 김재학 씨 피살사건 때에는 용의자 강모 씨가 범행을 저지르고 달아나는 전 과정이 생가 안 CCTV에 찍혀 범인을 짧은 시간 안에 잡을 수 있었다.

2월 숭례문 방화사건 때도 피의자 채모 씨의 행적이 찍힌 CCTV가 범인 검거에 결정적 열쇠가 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용의자, 미성년자 강간 10년 복역후 2년전 출소

“성폭행 하려했다”… 제2 혜진-예슬양 사건될 뻔

경기 고양시 일산 여자 초등학생 납치 미수 사건 용의자 이모(41) 씨가 31일 경찰 조사에서 “A 양을 성폭행하려 했다”고 진술함에 따라 이번 사건은 ‘제2의 이혜진 우예슬 양 사건’이 될 뻔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경찰의 최초 판단대로 사건을 단순 폭행 사건으로 처리했다면 이 씨도 안양 초등학생 피살 피의자 정모 씨와 같이 제2, 제3의 범행을 계속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이 씨는 12년 전에도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여자 초등학생을 때린 뒤 끌고 가 성폭행해 징역 10년의 실형을 복역하고 2년 전 출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 추가 범죄 추궁

경찰은 지난해 12월부터 최근까지 사고 발생 지점 인근 지역에서 최소 3건의 유사한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하고 이 씨에 대해 추가 범행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서 동거녀와 함께 사는 이 씨는 경찰에 붙잡혔을 당시에는 “26일 술을 마신 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다 무작정 대화역에서 내려 인근 아파트 단지에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이 씨는 “아파트 단지를 내려가다 A(10) 양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가다 A 양이 여러 차례 힐끗 뒤돌아보자 ‘나는 그런 사람 아니다’고 말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뒤쫓아 가 때렸다”고 주장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씨는 A 양이 비명을 지르자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오후 4시 15분경 대화역에서 지하철을 탄 뒤 수서역에서 내렸다.

○ 피할 수 없는 부실 수사 논란

용의자를 검거했지만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수차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러 부실 수사를 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사건이 발생 당일 현장 조사를 담당했던 대화지구대원들은 이 씨가 초등학생을 엘리베이터에서 강제로 끌어내려고 했고 흉기로 위협하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CC)TV 화면을 확인한 뒤에도 이 사건을 납치 사건이 아닌 단순 폭력 사건으로 보고했다.

27일 대화지구대로부터 사건을 접수한 일산경찰서도 곧바로 수사에 나서지 않았고 28일에도 사건을 배당받은 폭력1팀이 비번이라며 수사를 하지 않았다.

뒤늦게 수사를 시작한 29일에도 경찰은 흉기로 위협하는 장면을 다시 확인하고도 단순 폭력 사건으로 취급했다. 이에 따라 피해 어린이의 어머니와 사건을 목격한 B 씨에 대해서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늑장 수사로 일관하던 경찰은 30일 언론의 보도가 있자 부랴부랴 수사본부를 구성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한편 경찰은 이날 일산경찰서 형사과장과 처음 신고를 받은 대화지구대의 대장 등 6명을 직위해제했다.

고양=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 영상제공 : 일산경찰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