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문학 숲, 논술 꽃]①문학작품 심층-창의적으로 읽기

  • 입력 2008년 3월 10일 02시 59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재산가? vs 재산 축적에 눈먼 자본가?

흥부 놀부,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해보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소설 ‘흥부전’은 형제간 우애와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런 주제만큼이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흥부전’ 속 인물들의 특징이다. 예컨대, 흥부는 선량하고 자애로운 사람의 대명사로, 놀부는 심술궂고 탐욕스러운 사람의 대명사로 각각 인식된다. 그러나 흥부전 속 인물들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현대에 들어 역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조선 고대소설사’를 통해 흥부를 무능하고 의존적이며, 요행을 바라는 존재로 해석한 주왕산이나, 소설 ‘놀부뎐’에서 게으른 흥부와 도덕적이고 부지런한 놀부의 모습을 그려낸 최인훈은 ‘흥부전’의 인물상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를 거부하고, 흥부와 놀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최인훈의 ‘놀부뎐’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놀부 흥부 형제는 부모로부터 똑같은 유산을 물려받지만 갖은 고생 끝에 부자가 되는 놀부와 달리 흥부는 요행수를 바라다가 사기꾼에게 속아 거지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흥부가 큰 부자가 됐다는 소문을 듣게 된 놀부는 궁금함에 흥부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묻는다. 처음에 흥부는 ‘제비 다리와 박’ 이야기를 했으나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추궁하자 놀부에게 사실을 고백한다. 사실인즉 산에서 우연히 온갖 금은보화가 든 궤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놀부는 ‘반드시 화가 생길 것이니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충고하며 흥부와 함께 궤를 지고 산으로 가져간다. 그러나 두 사람은 궤의 주인인 전라감사가 매복시켜 뒀던 관원에게 잡혀 결국 옥에 갇혀 죽는다.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가 미덕이 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놀부와 같은 인물상이 자산관리 전문가로 각광받는 반면, 무능하고 자기계발에 게으른 흥부와 같은 인물상은 경쟁시대의 패배자로 비난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흥부를 선으로, 놀부를 악으로 여긴 전통적인 평가는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시대의 사회 풍토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동일한 작품 속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당대 사회의 문화와 세계관에 크게 영향받는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속속 드러나는 문제점의 사회적 반향이 커지는 오늘날 역시 ‘흥부전’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양극화의 심화, 환경 파괴, 공동체 질서의 붕괴, 인간 소외 등과 같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는 합리적 자산관리 전문가 놀부와 무능한 흥부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한다.

놀부는 재물에 대한 탐욕(좋게 말해 사적 이익 추구)의 노예가 되어 형제를 외면한다. 재물을 위해서 가족애라는 공동체적 가치마저 내동댕이친 놀부에게 또 다른 가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늘릴 수만 있다면 서민을 상대로 한 고리대(高利貸)도 서슴지 않을 것이며, 산을 깎거나 물길을 막는 ‘개발’도 기꺼이 할 것이다. 재물의 무한한 축적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놀부에게서 자본주의가 야기한 문제점을 해결할 실마리를 얻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흥부는 어떨까? 부자가 된 뒤에 가난한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고, 거지가 된 형을 돌보며 더불어 사는 흥부는 나눔의 미덕을 지닌 인물이다. 현대의 노블레스(Noblesse)를 재산가로 한정한다면 흥부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셈이다.

끊임없는 경제적 이익의 추구를 위해 가족간의 윤리, 사회 윤리, 환경 윤리를 저버린 놀부형 인간과 달리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요소까지 모두 포용하고 화해시키는 흥부형 인간형에는 자본주의가 붕괴시킨 공동체적 가치를 복원하는 힘이 깃들어 있다.

‘흥부전’의 인물들을 이와 같이 재평가해 보는 것은 산업화 시대에 실추된 흥부형 인간의 지위를 복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의 지식과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봉건시대의 인물상을 답습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더욱이 흥부와 놀부를 각각 긍정적 인간상, 부정적 인간상으로 도식화하는 것은 문학작품을 읽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흥부놀부 타령’을 하고 있는 이유는 동일한 문학작품의 인물들이 시대상의 변화와 관련하여 어떻게 달리 해석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오늘날의 현실과 관련하여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사례를 보이기 위함이다.

논술고사에 제시문으로 출제된 문학작품들을 참고서에서 다루는 것처럼 상투적으로 해석해서는 논제의 요구에 충실한 답안을 쓸 수 없다. 논제에서 다루는 주제와 관련하여 작품의 의미를 밝혀내고, 오늘날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좋은 답안을 쓸 수 있다. 논술고사의 제시문으로 등장한 문학작품 중 비교적 널리 알려진 것일수록 더 창의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한국외국어대 2008학년도 수시2-1논술고사에 출제된 ‘춘향전’을 두고 많은 수험생이 당혹스러워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춘향전’만큼이나 잘 알려진 ‘흥부전’을 두고 이 자리에서 ‘아직도 흥부놀부 타령’을 해본 이유다.

변혜경 ㈜엘림에듀평가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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