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돈받은 유권자 40명 ‘집단 자수’

  • 입력 2008년 1월 29일 02시 59분


경찰 “최대한 관용 방침” 배달사고 놓고 삿대질도

경북 청도군 청도읍 송읍리 청도경찰서. 관광버스 1대가 28일 오후 1시 경찰서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40명은 서둘러 3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청도군수 재선거와 관련해 돈을 받은 주민들이었다. 운문면과 금천면에 사는 이들은 오전에 운문면에 모였다.

정한태(55) 군수 등 22명을 구속한 경찰이 “돈을 받은 주민이 자수하면 최대한 선처하겠다”고 하자 한꺼번에 경찰서를 찾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대부분 50, 60대 남성. 창피해서인지 마스크를 했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 주민은 “혼자 나오기는 민망해서 수소문을 해 모였다”며 “지금 처지에서는 자수해서 죄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최선이 아니겠느냐”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주민들은 회의실에서 진술서 작성요령에 대해 간단히 교육받은 뒤 6, 7명씩 나눠 경찰관 앞에 앉았다.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돈을 얼마나 받았는지가 조사의 핵심. 졸지에 피의자가 된 이들은 진술서를 대충 작성하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

박모(62) 씨는 “그냥 10만 원 받은 게 이렇게 큰 짐이 될 줄 몰랐다”며 “결과야 어떻게 되든 조사를 받으니 마음은 좀 편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은 대부분 정 군수의 선거운동원에게서 5만 원이나 10만 원을 받았거나 다른 주민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단순히 돈을 받은 유권자는 최대한 관대하게 처리할 방침이지만 금품살포에 적극 가담한 주민은 엄하게 처벌할 계획이다. 현재 60여 명이 불구속 입건돼 조사받는 중이다.

주민의 진술에 따르면 ‘배달사고’가 적지 않았다. 정 군수 캠프에서는 10만 원씩 돌리라고 했지만 5만 원만 받았거나, 아예 돈을 받지 않았는데도 명단에 이름이 들어간 경우도 있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이 때문에 실제 몇 만 원이라도 받은 주민이 당초 알려진 대로 5000여 명인지 아닌지 지금으로선 분명하지 않다. 최대 1만 명이 될 수도 있다고 경찰은 추정한다.

한 주민은 “수천 명이 돈에 얽히면서 누가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하는 문제로 주민끼리 삿대질도 했다”며 “(경찰 조사 뒤) 자살한 사람들도 이런 데 얽혀 괴로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도경찰서 관계자는 “주민들이 선거와 관련해 돈을 받은 것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며 “어느 주민은 청도가 불법 선거운동으로 손가락질 받아서 죄송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청도에서는 농협장과 군·도의원 선거에 3억∼5억 원, 군수선거에 10억 원은 있어야 출마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선거 때면 공공연히 나돌았다.

주민들은 5, 6시간 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운문면과 금천면에 이어 이서면 주민 수십 명도 자수 의사를 밝혀 청도군 9개 읍면의 ‘자수 행렬’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경찰 역시 자수하라고 적극 알리고 있다. 돈을 받았을 수천 명을 직접 찾아내 조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경북지방경찰청 김수희 수사과장은 “돈을 받은 유권자도 그렇겠지만 경찰도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고민스럽다”며 “청도가 하루빨리 안정되려면 자수를 통해 사건을 매듭짓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청도=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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