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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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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주위의 이웃이 불행과 고통을 겪고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안됐다’는 생각은 해도 마음 아파하거나 괴로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율리아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누군가 하인리히의 머리카락을 쥐고 잡아 뜯어서 머리 껍질이 함께 떨어져 나간 거야……. 율리아의 아랫입술이 떨리기 시작했고,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이 장면은 ‘내 친구에게 생긴 일’*이라는 책의 주인공 율리아가 친구의 머리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마음 아파하는 장면입니다. 율리아는 하인리히와 한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율리아는 ‘아랫입술이 떨리고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습니다’. 마치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견디기 힘든 아픔과 슬픔을 느꼈다는 것이지요.
하인리히는 술 취한 의붓아버지로부터 걸핏하면 무지막지하게 얻어맞는 친구입니다. 심할 때는 가죽벨트로 맞아 온몸에 피멍이 들고,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잡아 뜯겨 머리 껍질이 벗겨질 정도이지요. 하인리히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도 잘 나누지 않을뿐더러, 통 웃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하인리히가 겪고 있는 끔찍한 일에 대해 다들 모르는 체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율리아만은 달랐습니다. 하인리히의 머리 상처를 발견하고 나서는 거듭 관심을 기울이며 말을 건네기 시작합니다. ‘하인리히가 맞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마음의 문을 좀처럼 열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율리아는 주위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엄마 아빠부터 시작해서 할머니 담임선생님께 차례로 도움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하인리히의 엄마마저 남의 집안일에 상관 말라며 도움의 손길을 뿌리쳤기 때문에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
율리아는 괴로운 마음에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문제를 해결합니다. 경찰 아저씨의 도움으로 하인리히를 또다시 폭행하던 의붓아버지를 현장에서 발견한 것이지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하인리히는 병원으로 실려 가고, 의붓아버지는 뒤늦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감옥으로 향합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여기서 한번 다 같이 생각해 봅시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왜 율리아만 하인리히를 그토록 끈질기게 도우려고 한 걸까요? 다시 말해, 왜 율리아만 ‘하인리히가 맞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율리아만 하인리히의 아픔을 자기 아픔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끼는 마음을 ‘동정심’이라고 부릅니다. 율리아가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한 것은 바로 이런 순수한 동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동정심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을 보고 겉으로는 불쌍해하더라도 실은 우월감이나 안도감을 느끼는 경우가 더 흔합니다. 이런 얄팍한 동정심으로는 이웃의 불행과 고통의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지요. 진정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이 아니므로 아무런 생각이나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동정심만이 비로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우리 마음이 계속해서 아프고 슬프기 때문이지요. 바로 율리아의 행동이 그 점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생각 가운데 진짜 소중한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이웃의 고통과 불행을 진정으로 아파하는 마음이 없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나올까요?
*미라 로베, ‘내 친구에게 생긴 일’(크레용하우스·2001년)
김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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