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된 실버들…사람을 젊게 만드는 묘한 마력

  • 입력 2006년 12월 10일 17시 11분


코멘트
'실버 기자를 모집합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나 신문 등에선 볼 수 없는 실버세대와 관련된 정책과 제도에서부터 따뜻한 실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고 느껴지신다면 실버넷 뉴스 기자에 도전하세요.'

실버넷뉴스(www.silvernews.or.kr)의 홈페이지에 떠있는 제 5기 실버기자 모집 공고다. 만 55세 이상 무보수 자원봉사 기자들을 모집한다. 실버넷 뉴스는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해 4만여 명의 실버들에게 인터넷 무료교육을 실시했던 실버넷운동본부가 비정치 비상업적인 실버언론을 기치로 2001년에 창간한 인터넷 신문.

무보수 실버기자라고 우습게 여기면 큰 코 다친다. 응모했다고 다 합격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컴퓨터를 다룰 줄 알아야 하고 기자로서 제대로 활동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선발됐다고 해서 바로 기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무려 5~6개월의 수습과정을 거친다. 나름대로 깐깐한 과정이다. 이 기간 중 3, 4회 서울의 실버넷운동본부에서 집체교육을 받는다.

교육과정은 취재방법, 인터뷰 하는 법, 기사작성법, 사진 찍기 등. 강사는 신문과 방송의 현직 차장급 이상 기자들이다. 이들은 자원봉사 차원에서 노인 기자들에게 기자교육을 해주고 있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후 수습기간 중 매주 인터넷으로 과제물을 받아 취재를 하고 기사를 송고하고 평가도 받는다. 평가에서 도중에 탈락하는 기자들도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실버넷 기자는 51명. 나이는 58세부터 82세까지로 평균 연령은 66세다.

실버 기자들. 은퇴한 뒤에 기자가 된 실버들이 스스로 평가하는 삶은 흥미롭다. 기자라는 이름에는 사람을 젊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들에게는 스스로를 젊어졌다고 평가하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말이다. 그저 무관심했던 주위의 갖가지 사물이 갑자기 관심과 취재의 대상으로 이들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실버넷 4기 기자로 올해 8월부터 정식으로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엄상흠(71·서울 강동구 천호4동 314-19) 씨의 방 벽에는 'press'라는 표식이 새겨진 행사장 출입증 수십개가 장식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다. 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나 강동구 올림픽경기장에서 있었던 각종 행사의 주최기관들이 발행했던 언론인 출입증이다. 그는 기자가 되기 전에는 하루 종일 동네 노인들과 바둑을 두는 게 일이었지만 지금은 매일 아침 9시면 취재를 나간다. 주 출입처는 올림픽 경기장과 코엑스. 이곳에는 거의 매일 새로운 행사가 열리기 때문에 취재거리가 많다. 행사기관마다 그가 실버넷 기자증을 제시하면 두 말 않고 출입증을 주면서 여러 가지로 취재편의를 제공한다. 얼마 전에는 올림픽 공원에서 열렸던 '보리밭 밟기' 재현 행사의 사진을 실버넷에 띄워 큰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은퇴 전에 고속도로 휴게소 건설업, 예식장 경영 등을 했던 그는 지금은 부인(67)과 단둘이 살고 있고 생계에는 큰 걱정이 없을 정도다. 두 아들은 모두 국내외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대기업 등에서 근무하고 있다. 스스로 3보 이상 걸을 때는 꼭 휴대한다는 그의 취재가방에는 디지털 카메라, 취재수첩, 행사장에서 받은 취재자료, 야외취재용 벙거지 모자, 방한용 머플러 등이 들어 있었다.

그는 "기자가 된 뒤에는 모든 게 취재 대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관심도가 달라졌고 행동이 활기차게 변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또 기사를 올릴 때마다 며느리들이 한마디씩 아부(?)의 말을 해주고 주위 사람들도 관심을 표시 해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실버넷 3기로 현재 1년 반 동안 기자생활을 하고 있는 권오갑(82·서울 금천구 시흥본동 861-1) 씨는 최고령기자다. 그는 대학교수 출신으로 침례교 신학대에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65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집에서 가끔씩 의뢰가 들어오는 번역 일을 하다 우연히 실버넷 기자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그는 주로 지역사회의 복지관 노인학교 등을 상대로 미담기사를 많이 발굴하려고 노력한다. 또 남녀노소간 분별과 존중이 사라져가는 세태를 비판하는 칼럼형 기사를 게재하기도 한다.

팔순이 넘은 기자가 취재를 하려가면 상대편의 반응이 어떨까? "상대편에서 한번도 난색을 표명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협조해주고 자료도 잘 챙겨주지요. 물론 노인시설을 주로 취재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호응도가 좋았던 것일 수도 있겠지요."

한달에 5, 6건의 기사를 띄운다는 권씨는 재미와 취미 그리고 보람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순자(67·여·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1401-6) 씨는 실버넷의 교육문화부장을 맡고 있다. 미국에서 20년 이상 살다가 7년 전 귀국한 황씨는 실버넷에 생활영어 한마디를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다. 남편과는 오래전 사별했고 2남 1녀의 자녀들도 모두 출가해 현재 혼자 살고 있다. 그는 주로 고발이나 시정촉구 기사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으로 잘못된 일이나 납득이 안가는 제도 등에 대해 비판기사를 작성한다. 그는 자신이 쓴 기사에 대해 다른 사람이 공감을 표시해줄 때 큰 보람을 느낀다. 그는 "무보수 자원봉사 기자지만 이 일을 하고 나서부터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취재 대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동우사회복지전문기자 foru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