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지망생, 2천만원 빚갚으려다 60억 날려

  • 입력 2006년 8월 21일 17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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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월 서초구 잠원동의 D커피숍.

"엄마, 엄마가 조금만 도와주면 나 영화배우도 될 수 있고 가수도 될 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어머님이 이 계약서에 사인만 해 주시면 따님을 스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을 속이고 60억대 가족재산을 사채업자에 모두 넘어가게 한 20대 연예인 지망생 여성과 사채업자 7명이 경찰에 적발됐다.

오모(24·여) 씨가 사채업자 송모(40) 씨를 찾아간 건 2002년 8월.

탤런트 지망생인 오 씨는 2001년부터 모 방송국의 시트콤 스탭으로 일하다 2000만 원의 빚을 지게 됐다. 한도액을 넘게 쓴 유흥비를 급히 '돌려막기'하려다 빚어진 일이었다.

당시 어머니 송모(52) 씨는 병으로 쓰러져 있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오 씨는 이 문제를 상의할 사람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오 씨는 2002년 7월 생활광고지에서 본 경기 부천시의 한 대부업체를 찾아갔다.

이 업체는 서울 종로구의 다른 대부업체를 소개시켜줬다. 오 씨는 사채업자가 시키는 대로 가족 몰래 인감도장을 훔쳐 가짜 인감증명 위임장을 발급받고 가족공동소유의 부동산 등기권리증을 가져다 3000만 원을 빌렸다.

등기부등본이 무엇인지 근저당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사회 경험이 부족했던 오 씨는 이자율에 대한 설명조차 듣지 못했다.

이자는 한 달에 60만 원 씩 불어났다.

사채업자들은 오 씨가 이자를 감당치 못하자 근저당권을 다른 사채업자에게 매매하는 수법으로 오 씨의 채무를 넘겼다.

이 과정에서 이자와 원금은 눈덩이처럼 불어 당초 2000만 원에서 시작된 빚은 2년여 만에 20억 원이 됐다.

사채업자들은 오 씨를 통해 그가 어머니, 언니, 남동생과 함께 경기 남양주시 일대의 토지 1만3000여 평을 공동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들은 오 씨를 속여 가족들의 인감증명 위임증 등을 받아내 이 토지와 어머니 송 씨 소유의 잠원동 아파트 1채까지 근저당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이들의 협박은 계속됐다. 이를 견디지 못한 오 씨는 사채업자 송 씨의 제안대로 어머니에게 사채업자를 유명 연예기획사 대표라고 소개한 뒤 연예인 계약을 맺는 데 필요하다며 부동산 매매계약서를 내밀었다.

평소 딸의 말이라면 굳게 믿었던 어머니는 의심 없이 서명을 했다.

오 씨는 이 대가로 송 씨에게 6500만 원을 빌리는 등 2004년 9월까지 4개 사채업체로부터 총 10억여 원을 빌렸다.

그러나 그 사이 시가 60억 원 상당의 가족 재산은 사채업자들의 손에 모두 처분됐다.

어머니 송 씨는 딸과 사채업자에 속아 전 재산을 날린 뒤 월셋방을 전전하다 결국 이들을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오 씨는 경찰조사에서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은 5000만 원이 안 된다"고 진술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오 씨의 변호인은 "사채업자들은 오 씨를 사무실에 감금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어머니를 해칠 것처럼 협박했다"며 "카드대금을 해결하려다 고리 대출의 덫에 걸린 전형적인 예"라며 안타까워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21일 부동산 등기권리증과 인감도장을 훔치고 다른 가족의 인감증명위임장 등을 위조한 혐의(사문서위조 등)로 오 씨를 구속하고 사채업자 7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임우선기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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