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카르텔’…한국 표절 문화 현주소

  • 입력 2006년 7월 26일 03시 06분


우리 학계의 표절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로스쿨에서 리포트 작성 시 조금이라도 표절한 사실이 있다고 밝혀지면 퇴학 조치는 물론 변호사협회에 통보해 변호사 시험의 응시 기회까지 박탈하는 미국과 비교하면 국내 학계의 현실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미국에서는 기술적으로 한 문장 중 6개 이상의 단어가 일치할 경우를 표절로 판정하는 경우가 많다. 설사 표현을 달리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논문 내용을 발췌 내지 요약하면서 그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것도 표절로 간주된다.

그러나 국내 학계에서는 ‘다른 사람의 글을 훔치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희박하다. 이에 따라 △외국의 논문을 통째로 번역해 번듯한 논문으로 둔갑시키기 △제자의 논문에 무임승차하기 △같은 논문을 조금씩 바꾸어 여기저기 기고하기 △출처 흐리기 등이 ‘학계의 관행’이라거나 ‘고의성이 없는 실수’라는 말로 포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학계의 관행이라는 변명은 우리 학계의 전문성과 도덕성을 스스로 갉아먹는 행위라는 것이 양심적인 학자들의 지적이다. 그리고 표절 여부의 판단에는 고의성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미국의 많은 대학이 신입생들에게 표절을 안 하겠다는 서약서를 받는 것은 표절에 관한 한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믿음 때문이다. 표절의 습관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는 1987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조지프 바이든(델라웨어 주) 상원의원의 경우다. 당시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혔던 바이든 의원은 멋진 연설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연설문 중 하나가 영국 노동당의 닐 키녹 의원의 연설문을 표절한 것이 밝혀져 후보에서 사퇴했다. 더욱 가관은 바이든 의원의 사퇴 연설문도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표절했음이 밝혀져 망신을 당한 것. 그뿐만 아니라 바이든 의원이 로스쿨 재학 당시 표절로 인해 F학점을 받은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표절 중독의 심각성을 보여 줬다.

학계 일각에서는 미국의 기준과 단순 비교해 국내의 표절논란을 일방적으로 재단하거나 과거의 관행을 오늘의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저작권 문제 전문가인 박성호 한양대 법대 교수는 “한국 학계의 표절 문화는 압축 성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외국과는 다른 역사적 구조적 문제가 개입돼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의 선진사상과 학문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표절 문제에 대한 불감증을 낳았고, 이들이 학계의 원로가 되다 보니 표절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스승의 학문적 업적을 공격하는 것이 돼 표절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지 못하는 문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해 이제부터라도 학문 공동체에서 엄격하고 구체적인 표절 기준을 수립해 앞으로의 학문적 성과에 적용해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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