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비참하게 간 13살 소녀

  • 입력 2005년 6월 24일 16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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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영희(가명·13)양
故 최영희(가명·13)양
“영희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저 하늘에선 편히 쉬렴.”

지난 20일 충북 진천지역아동센터에서는 고은영 목사의 집전하에 최영희(가명·13)양의 영결식이 열렸다. 친구들의 눈물 속에 최양의 시신은 청주교회 ‘하늘정원’에 안장됐다.

지난 14일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발견된 최양은 청주 연쇄살인사건의 세 번째 피해자다.

내연녀를 둘이나 죽이고 도주중이던 김모씨(39)가 지난 5일 후배 딸인 최양을 유인해 성폭행한 후 목졸라 암매장한 것. 김씨의 자백으로 최양의 시신은 14일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배티성지 부근에서 발견됐다.

세간의 관심은 온통 ‘연쇄 살해 암매장’에만 쏠려있지만, 아동복지 전문가들은 최 양과 같은 빈곤 가정의 아동들이 얼마나 쉽게 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하고 있다.

▽“영희는 전부터 성적 학대를 받아왔다”▽

그동안 최양을 돌본 것은 가정이 아니라 아동보호센터였다.

3살 무렵 어머니가 가출한 후 아버지(31)는 한달에 한 두번 집에 들어올 뿐 최양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병든 할아버지(80)와 연년생 남동생과 2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사는 최 양에겐 지역아동센터에서 노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다 지난 2월 할아버지가 후두암 판정을 받아 입원하게 되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보통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건 행복한 일이겠지만 최 양에게는 불행의 단초가 됐다. 아버지가 전과 9범인 선배 김씨를 집안에 들인 것. 이후로 김씨는 두달 동안 최양네 집을 들락날락 거렸다.

최 양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인지능력이었지만, 키 157cm 에 50kg의 몸무게였다. 지역아동센터 관계자는 “영희는 척 보기에도 다 큰 처녀였다”고 말했다. 이런 최 양에게 미묘한 변화가 생긴 것을 눈치 챈 아동센터 관계자들은 김씨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봤다.

한 관계자는 “선생님들이 청소를 하러 일주일에 두 번씩 영희 집에 들르는데 이 때마다 안에서 문을 잠궈 들어갈 수가 없었다”며 “아동이 오줌소태가 있고, 심리상태가 불안해져 4월경에 아동학대상담센터에 상담을 의뢰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5월 28일 밤에는 김씨가 영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1시간쯤 외출을 하고 돌아왔었다”며 “심상치 않은 느낌에 옷을 벗겨 보니 여기저기 긁힌 자국도 있고, 신체적 변화도 있었다”고 말했다.

의심스런 일이 계속되자 아동센터 교사들은 또다시 아동학대 상담센터에 최양 가족의 상담을 의뢰했다. 아동센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였다. 최양은 친부가 버젓이 있었기 때문.

아동센터 관계자들은 “문화활동이나 상담을 통해 많은 사랑과 관심을 주었지만 귀가 후에는 제도상의 한계로 도울 수가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최 양이 실종됐다. 전날 친구에게 빌린 자전거를 돌려주러 간다던 아이의 행방이 묘연해졌고 아동센터측은 즉각 김씨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빈곤 아동 지켜줄 제도적 장치 시급”▽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은 힘없는 아동을 지켜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때문”이라며 “가정이 보호 역할을 못할 때 아동을 일시적으로라도 맡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전국 800여개 지역아동센터에서 돌보는 3만 여명의 아동 중 평균 10% 정도가 최양과 같이 관리가 시급한 ‘요보호 대상자’다. 지난 23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전국 빈곤 아동은 약 122만 8000명. 12만명 정도는 성추행이나 범죄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정렬 전국아동센터 사무국장은 “지역아동센터는 시설이나 운영비 등이 열악해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다”며 “이대로는 ‘제 2의 영희’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현재 여야 여성의원 10여명이 함께 ‘학령기 아동보호및 교육지원에 대한 기본법(가칭)’안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법안은 현재 지역아동센터의 기능을 강화해 성폭력예방교육과 가족상태에 대한 상담 등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기능과 예산을 강화하고, 전문 상담 교사를 파견하는 방향으로 추진중이다.

시민단체들은 오는 29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최양 추모 촛불 집회를 계최할 계획이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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