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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5월 12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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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서는 조선왕조사의 가장 처참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보지 못하고, 차마 말할 수가 없다”(영조)고 했던.
노기등등한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했다.
의연하던 세자는 끝내 무너진다. 혈육의 정에 호소하며 매달렸다. “아버지, 임금님, 저를 살려주소서!”
그러나 영조는 매몰찼다. 세자가 뒤주에 들어가자 직접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자물쇠를 잠근 뒤 대못을 박고 동아줄로 묶도록 명하였다.
그 여드레 뒤 세자는 숨진다. 복(伏)날이 낀 여름이었다. 세자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컴컴한 절망 속에서 죽어 갔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사도세자(思悼世子). 그는 영조가 마흔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유일한 혈손이었다. 그런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이다니.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 적었듯이 그것은 단지 “정신병자인 세자와 이상성격자인 영조의 갈등”일 뿐이었는가. 그것은 분명 ‘권력의 충돌’이었고 정변(政變)이었다.
1724년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 그는 ‘신하가 임금을 가리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가까스로 왕위에 올랐다. 소론은 경종 편이었고 노론은 영조 편이었다.
문제는 세자였다. 그는 소론과 어울리며 정치개혁의 꿈을 키워나갔다. 조정은 부당(父黨·영조·노론)과 자당(子黨·세자·소론)으로 찢긴다.
노론은 영조가 노환에 시달리자 초조했다. 어떻게든지 세자를 제거하고자 했고, 마침내 그를 역모로 고변하는 승부수를 띄운다. 그 노론의 중심에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있었으니.
혜경궁 홍씨는 냉혹했다. 남편을 없애는 대신 아들을 옹립하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좇았다. 사도세자는 부인이 원망스러웠다. “자네는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사도세자가 죽고 천하는 노론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러나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또다시 바뀌었으니, 그의 즉위 일성(一聲)에 노론은 간담이 다 서늘하였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은 그 뒤 처절하게 몰락한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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