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 가치관’ 大法보다 憲裁서 많이 드러나

  • 입력 2003년 8월 17일 19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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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인적 구성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된 신임 대법관 인선 파문은 근본적으로는 대법원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시각차에서 출발한다.

대법원 관계자는 우리 대법원의 경우 엄격한 법률심이기 때문에 법관의 자의적 법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좁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헌법재판소가 헌법과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사회가 가야할 방향에 대한 포괄적이며 법이념적 판단을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파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각각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리고 미국의 연방대법원과의 비교도 필요한 부분이다.

▽대법원=우리나라에서는 사소한 사건도 대법원까지 거치려 하는 국민의 ‘법 감정’ 때문에 대법원은 연간 2만여건의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법원측은 ‘실무법원’의 성격이 강조되는 우리나라 대법원의 특성상 다양성 보다는 신속한 권리구제를 강조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재판경험이 풍부한 법관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더욱이 미국은 판례로 법을 만들어가는 ‘판례법’ 체제이기 때문에 연방대법원의 이념과 가치판단이 중요하지만 우리나라는 ‘성문법’ 체제로 미국과 우리나라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한다.

또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우리나라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겸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 대법원은 ‘법률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에서 생각하는 ‘정책법원’으로서의 기능은 우리의 경우 헌법재판소가 그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헌법재판소=제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1987년 독일식 헌법재판소를 모델로 설립된 헌법재판소는 근래 들어 그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10여년 전만 해도 연간 접수 건수가 200∼300여건에 불과했으나 2001년부터는 연간 1000여건 이상의 사건이 접수되고 있다. 더구나 접수 사건의 90% 이상이 헌법소원으로 모두 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은 것들이다.

헌재는 법률보다 상위법인 헌법에 대해 ‘유권해석’을 하기 때문에 법원 판결보다 사회적 파장이 크고 법관 개인의 성향이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대법원 판결보다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재야 법조계의 입장=그러나 변협 등 재야 법조계 등에서는 “대법원의 일반 민·형사 사건이나 가사 사건에 있어서도 법관의 가치 판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반박한다.

일례로 이혼과 관련해 민법이 규정하는 ‘기타 혼인을 지속하기 어려운 경우’ 등을 판단할 경우만 해도 사회 변화에 따라 대법원이 판례로서 새로운 이혼 사유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급변하는 사회에서 미처 법이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법으로 규정하기 힘든 ‘공백’을 대법원이 법 해석을 통해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

이들은 또 대법원에서 13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하는 사건이 너무 적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법원은 1차적으로 4명의 합의부에서 사건을 심리한 뒤 소수 의견이나 기존의 판례와 배치되는 결론이 나올 경우에만 전원합의체로 사건을 옮겨 심리한다.

대법원에 따르면 대법관 과반수의 의견으로 판결을 내리는 전원합의체 판결은 2000년 11건, 2001년 12건 등 연간 10여건 정도다.

대법원-헌법재판소-미영방대법원 비교

대법원헌법재판소미국 연방대법원
법관 수14명9명9명
법관선정대법원장 제청으로 국회 동의 받아 대통령이 임명대통령, 대법원장, 국회가 3명씩 지명해 선출대통령이 지명한 뒤 상원의 승인을 거쳐 임명
임기6년 연임가능6년 연임가능종신
심리기준법률헌법헌법 및 법률
심리대상상고심 및 행정규칙의 위헌 여부 등법률의 위헌여부, 헌법소원, 정당해산, 탄핵, 권한쟁의행정 및 입법행위에 대한 위헌심사권, 연방지방법원·연방항소법원·특별법원으로부터의 상소 심리 등.
합의부 운용4명의 재판부에서 심리하다 소수의견이 나오거나 판례를 뒤집는 결정이 날 경우 13명 전원합의체로 결정항상 9명의 재판부가 심리항상 9명의 재판부가 심리
소수의견중요사건을 제외하고 표명되지 않음항상 소수의견 명시항상 소수의견 명시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청와대 '대법관 제청' 강경기류 배경▼

대법원의 신임 대법관 제청을 앞둔 17일 청와대 내부에서는 강경 기류가 여전했다.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이날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며 언급을 피했지만, 다른 관계자들은 비공식 언급임을 전제로 “개혁적 방향으로 인선이 돼야 한다는 데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대법관 제청을 한 뒤 그 결과를 보고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분명한 입장을 밝힐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대법원이 ‘헌법재판소 재판관에 개혁적 인사를 추천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은 데 대해서도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번에 제청할 대법관을 그렇게 추천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청와대가 강경 기류를 유지하고 있는 데에는 2005년 9월로 예정된 차기 대법원장 인선까지 포함한 ‘장기 포석’을 고려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에서 첫 대법관 임명이 될 이번 인선부터 기존의 서열주의 관행을 차단해야만 차기 대법원장 인선 때에도 개혁적인 인사의 발탁이 가능하리라는 것. 차기 대법원장은 현 정부 임기 중에 무려 9명의 대법관을 새로 임명하게 되고, 사실상 대법원의 구성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열쇠를 쥘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한 핵심관계자는 “대법관 제청 문제로 사법부와 정면충돌을 감수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여기에서 기존 관행을 인정하게 되면 차기 대법원장 인선 때도 서열주의를 깰 수 없게 된다”면서 “그 점에 고민이 있다”고 털어 놓았다.

노 대통령 역시 대법원이 바뀌어야만 각 분야의 보수적인 판례가 새로 정립되고, 사회의 진보라는 측면에서 정권교체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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