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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3월 24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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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부대’〓“우리는 급하게 조직된 외인부대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거대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칙과 정도의 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진실의 문과 맞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01년 12월10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감정원 7층 특검 사무실. ‘이용호 게이트’에 대한 수사를 맡은 차정일 특별검사가 차분하고 굵은 목소리로 첫 회의를 주재했다. 이날은 특별검사 사무소 현판식과 함께 특검팀 진용이 공개된 첫날이었다.
‘원칙과 정도.’ 이 말은 전국 모든 검찰청에 빠짐없이 걸려 있었다. 그해 5월 취임한 신승남(愼承男) 검찰총장의 복무방침이었다. 그는 이용호 게이트 수사를 끝낸 뒤 “특검 할애비가 와도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고 장담했다.
과묵하고 차분한 인상의 이상수(李相樹) 특검보와 낙천적인 인상의 김원중(金元中) 특검보 역시 긴장된 모습이었다.
‘두 차례의 검찰 수사와 특별감찰본부의 감찰까지 거치면서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우리 외인부대가 밝혀낼 수 있을까….’
과연 특검과 검찰의 ‘원칙과 정도’는 어떻게 다를까. 작업은 만만찮았다. 대검에서 넘어온 수만쪽 분량의 수사기록을 검토하는 데만 열흘이 넘게 걸렸다. 얽힌 실타래 같은 이용호씨 관련 계좌 추적에 밤을 새우며 매달렸지만 성과가 없었다.
▽열리는‘진실의 문’〓‘이대로 연말을 넘기면 어쩌나….’ 모두가 초조해하던 12월31일 계좌추적팀에서 첫 번째 성과가 나왔다. 이기주(李基炷) 전 한통파워텔 사장이 이용호씨의 전환사채(CB) 발행 과정에 개입해여운환(呂運桓)씨에게서 1000만원을 받은 혐의를 밝혀낸 것. 특검 출범 20일만의 첫 개가였다.
2002년 새해가 밝아오면서 신승남 당시 검찰총장의 동생 신승환(愼承煥)씨 문제가 특검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가 2001년 6월 이용호씨 회사에 취직하면서 월급과 스카우트비 등으로 받은 돈은 6666만원. 우연이었겠지만 불길한 숫자의 조합이었다. 2001년 9월 대검 중수부는 ‘스카우트 비용’이라며 면죄부를 주었다.
“돈 주고 취직하기도 어려운 세상에 특별한 경력도 없는 사람에게 거액의 스카우트 비용을 줬다는 게 말이 되나?”
차 특검은 비장의 승부수를 던졌다. 신승환씨가 받은 돈이 이용호씨의 부실채권 인수 등을 위해 금융기관 관계자에게 청탁해 주는 대가로 받은 것이라고 결론짓고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 구속영장이 나올까. 다음날 영장 심사 때까지 차 특검은 잠을 못 이뤘다. 신경이 곤두서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독한 술을 마시고 잠깐 눈을 붙였다.
1월13일. 영장이 발부됐다. 특검팀의 ‘진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신승남 검찰총장도 그날 밤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신승환씨가 안정남(安正男) 전 국세청장에게 감세를 청탁한 사실도 ‘덤으로’ 밝혀냈다.
1월15일 전 현직 경찰관으로 구성된 검거반은 이용호씨와 주가 조작을 공모해 154억여원의 시세차익을 남긴 뒤 검찰 수사를 피해 잠적했던 전 대양금고 실소유주 김영준(金榮俊)씨를 붙잡았다. 그는 검찰이 석달 동안 잡지 못한 인물. 금융감독원 감리위원으로 재직 중이던 모여대 김모 교수가 김씨와 동행하는 등 도피 과정에 개입한 사실도 밝혀냈다.
▽쇄도하는 격려〓“특검이 수사하니 검찰과 완전히 다르다. 힘을 내어 정의를 세워달라.”
특검 사무실에는 시민들의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왔다.
특검팀은 검찰이 묻어둔 또 하나의 ‘블랙홀’을 찾았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처조카인 이형택(李亨澤)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에 대한 수사였다. 검찰은 이씨에 대해 서면조사를 시도했다가 여의치 않자 잠깐 불러 조사한 뒤 끝낸 상태였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특검팀은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다. 이씨가 이용호씨의 보물 발굴 사업에 개입해 수익의 15%를 나눠 갖기로 약정한 ‘매장물 발굴 협정서’를 확보한 것이다.
특검팀은 이형택씨가 청와대 국가정보원 해군 등 국가기관을 동원해 보물 발굴 사업을 사실상 주도한 사실을 밝혀내고 2월1일 이씨를 구속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이기호(李起浩)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씨가 구속되자 광주에 산다는 한 시민은 ‘떡값’으로 쓰라며 2만원을 넣은 편지를 수사팀에 보내왔다. 수사팀은 “서민들이 생각하는 떡값과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떡값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벗겨지는‘성역’〓수사팀은 ‘수사 중단 압력’ 의혹 수사에도 칼날을 겨눠 이형택씨가 대검 수사 당시 신승환씨의 금품 수수 사실을 신 전 총장에게 알려달라고 김홍업(金弘業)씨의 고교 동창인 김성환(金盛煥)씨에게 부탁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수사는 김성환씨의 잠적으로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2월 중순. 수사기간이 연장되면서 수사팀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파견나온 검사 3명은 체중이 3∼4㎏씩 빠졌고 수면 부족으로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그러나 이제 특검팀은 더 이상 외인부대가 아니었다.
2월19일. 특검은 ‘대형사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수동(李守東) 아태평화재단 상임이사가 이용호씨에게서 5000만원을 받은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1963년 6대 총선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일해 ‘동교동의 영원한 집사’로 불린 인물이었다. 수사는 이제 권력의 ‘성역’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씨에 대한 구속영장도 예상대로 발부됐다. 이씨에게 돈을 전달한 도승희(都勝喜) 전 인터피온 사외이사가 지난해 11월 초 대검에서 조사받기 직전에 검찰 고위 간부가 이씨에게 수사 정보를 유출했다는 의혹도 새로 불거졌다.
특검은 이씨가 보관했던 ‘정권재창출’ ‘신문개혁’ ‘해군참모총장 인사’ 관련 문건을 이씨의 집에서 압수하고 이씨와 아태재단의 국정농단 의혹을 캐기 시작했다.
3월8일. 특검팀은 ‘못 볼 것’을 보기 시작했다.
김홍업씨의 측근인 김성환씨의 차명 계좌를 찾아내 이곳에서 김홍업씨와 아태재단으로 돈이 흘러들어간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김성환씨의 10억원대 계좌도 발견했다. 조그만 물줄기는 시냇물로 변해 큰 저수지로 향하고 있었다. 돈세탁도 치밀했다.
▽‘공’은검찰로〓 그러나 특검은 ‘마지막 꽃’을 피울 수 없었다. 특검법이 정한 수사 기간과 범위의 제한 때문이었다.
“돈을 세탁해 건네는 수법도, 돈의 액수도 평생 보기 힘든 겁니다. 검찰로 넘겨지면 꽃을 피울 겁니다.”
이제 공은 다시 검찰로 넘어갔다. 특검 수사의 끝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다.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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