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정부 홈페이지 한자 남발

  • 입력 2000년 10월 8일 18시 46분


한글을 쓰면 권위가 떨어지고 한자를 써야 더 ‘근엄’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탓일까.

‘누구나 방문해 정부 정책을 보고 평가해 달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정부 각 부처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권위적이고 생소한 한자가 너무 많이 사용돼 네티즌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일부 부처는 심지어 한글날 행사 관련 글까지도 한자 투성이로 적어 올리는 등 정부부처의 ‘한글 무시’ 경향이 도를 넘어섰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이 가장 심한 곳은 국무총리실 홈페이지(www.opm.go.kr). 첫 화면 게시물 안내부터 한자 투성이다. 한글로 써도 아무 지장이 없을 ‘李漢東 國務總理 動靜’도 한자로 적혀 있다.

이 홈페이지 자료실에는 지난해 한글날 김종필 전총리가 한 출판기념회에서 했다는 치사가 ‘標準國語大辭典 出版紀念會 致辭’라는 제목으로 올라 있다.

“이러한 時代에 우리 한글을 지키고 더욱 發展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한글을 더욱 科學化하고 情報化해서 競爭力을 갖게 해야 한다.”

“오늘날, 先進된 나라의 國民들은 母國語를 바르고 아름답게 쓰는 일을, 國民된 義務이자 자랑으로 삼고 있다.”

치사 내용은 분명 한글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한글 사랑’인데 그 표기는 거꾸로다.

경찰청 홈페이지 첫 화면에 나와 있는 경찰청장의 글 제목은 ‘警察改革의 積極的 推進을 위한 警察廳長 指揮書信’이다. 문화관광부 홈페이지 자료실의 ‘課稅資料의 提出 및 管理에 관한 法律施行令案課稅資料’에는 ‘審議番號 議決事項 議決年月日’까지도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꼭 한자는 아니더라도 ‘체인탈부착장’ ‘분류하수관거차집시설’ 등 국적 불명의 단어들이 정부부처 홈페이지 곳곳에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사이버공간에서 한글 지키기 운동을 하고 있는 네티즌 단체 ‘우리말을 바꾸고 지키는 한말글 전국 통신인 모임’의 조상현대표(29)는 “‘정보를 모든 국민에게 공개하고 공유하자’는 인터넷에서조차 한자를 남발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이완배기자>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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