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재수를 결심한 아들에게

  • 입력 1997년 1월 28일 20시 25분


사랑하는 주성아. 원하는 대학에 불합격,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너를 보기가 무척 안쓰럽구나. 너는 이제까지 한번도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잘 지켜주어서 늘 고맙고 대견했다. 엄마는 네가 합격한 H대나 후보합격을 기다리는 K대에 그냥 다녔으면 좋겠는데 재수를 하겠다니 안타깝구나. 좋은 학교는 일반적으로 도서관이 좋고 교수의 자질이 훌륭하며 함께 공부하는 학생의 수준이 높은 학교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연줄망이 워낙 중요하게 작용되기 때문에 선배들이 요직에 많이 포진하고 있는 학교가 좋은 학교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대학마다 도서관이나 교수의 자질은 별 차이가 없어 학생의 수준과 선배들의 출세도에 따라 대학의 우열이 결정되고 있다. 더구나 출신 대학이 취업시장이나 중매시장에서 인물 평가의 잣대로 활용되는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네가 받은 성적을 기준으로 평가되는 자신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그 점수대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한국적인 상황에서 이해가 간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네가 H대에서 공부한다고 해서 학구열이나 인식욕이 떨어져 나태해지겠니. 오히려 뚜렷한 건학이념과 열린 시야를 가진 전통있는 사학이 관학보다 국제 정보화 사회에 역동적으로 잘 대응할 수 있고 너같이 수능 영어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네가 재수하여 더 나은 성적을 받아 S대를 졸업하더라도 내재적 가치가 H대보다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너는원하는만큼 학원과외를 받았고 학구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공부했다. 우리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여 잠재능력에 비하여 점수가 형편없게 나온 다른 친구들도 많다. 주성아, 너는 비록 S대에 떨어졌으나 10여년을 천편일률적인 입시훈련으로 낭비한 다른 친구들보다 인생을 풍성하게 살아 왔고 또한 많은 학창생활의 추억을 저축하지 않았느냐. 제발 부탁이다. 겨우 빠져나온 입시터널 속으로 다시 들어갈 생각은 말아라. 엄마는 네가 현재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학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은 능력으로 사는 것이지 학벌이라는 상표로 사는 것이 아니다. 제발 재수는 말아다오. 젊은 날의 귀중한 1년을 내재적 가치를 높이는데 쓰는게 더 효율적이지 않겠니. 부탁이다. 유 정 순<배재대 가정교육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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