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와신상담은 단련의 시간”… 약자 동행 외치는 ‘승부사 오세훈’[황형준의 법정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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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7월 1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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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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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공부한 지 3년 만에 사법시험을 통과했다. 환경 전문 변호사에서 TV 방송 진행자로,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뒤 45세 최연소 서울시장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30, 40대에 일종의 퀀텀 점프를 한 것이었다. 훤칠한 키에 귀공자 같은, 호감 가는 외모로 특히 여심을 사로잡았다. 출세 가도를 달리며 만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성공한 인생’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하 오세훈)의 정치 인생만 놓고 보면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전반전’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후반전’이 시작된 2011년부터 2021년까진 좌절이 이어졌다. 겨울은 길었다. 한 번 KO패 해도 타격이 큰 데 세 번의 선거에서 떨어졌다. 서울 종로, 서울 광진을 국회의원 선거와 당 대표 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한 것이다. 주변에 이른바 ‘측근’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도 한번쯤은 화투 용어인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래도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남들은 안 될 거라고 했지만 2021년 10년 만에 다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도전해 3선 서울시장이 됐고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4선 서울시장이 됐다.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정치 공백 10년 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재도약을 위해 공부했고 반성했고 스스로를 단련했다. 그 10년이 결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었다. 자신을 담금질하는 시간이었다.

“제 정치적인 운명에 대해서 어떤 확신 같은 게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선거에 떨어져도 그렇게 큰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이건 어느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이다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또 공부했네’, ‘나를 다듬는, 나를 단련하는 훈련하는 기간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10년 동안 뭐가 제일 힘들었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한 번도 힘들었다고 답변한 적이 없다. 나는 계속 충만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로 선거에서 떨어지는 날, 광진을에서 떨어지는 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취재 메모 중 -
그는 지금 연장전을 뛰고 있다. 전반전에서의 득점과 후반전에서의 실점을 넘어 이제 연장전에서 마지막 승부를 기다리고 있다.

● “공부해야 가난 이겨낼 수 있다” 교육열 높았던 어머니

1995년 당시 오세훈 시장 가족의 모습. 동아일보DB
1995년 당시 오세훈 시장 가족의 모습. 동아일보DB
오세훈은 1961년 1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소건설회사를 다녔고 아버지 월급만으로 부족했기에 어머니는 방석과 베갯잇 등을 만드는 수예점을 하셨다. 아버지 월급이 몇 달씩 지체돼서 며칠 라면이나 싸라기 밥만 먹으며 지낸 적도 있고 이모님 댁에 돈 꾸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잡아준 택시에서 내려 걸어온 적도 있었다.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늘 “세훈아, 공부해야 이 가난을 이긴다”고 강조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세훈이가 몸이 약하니 특별히 신경을 쓰시라”는 말을 듣고 1년 내내 된장찌개와 밥을 담은 쟁반을 보따리에 싸서 학교까지 갖다줄 정도로 아들을 챙겼다.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인지 그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6년 내내 반장을 놓치지 않았다.

학창 시절 그의 별명은 일본어로 젓가락인 ‘와리바시’, 키가 커서 책상에 엎드려 잘 때 새우처럼 등이 굽어진다는 의미의 ‘잠새우’ 등이었다. 고교 시절 그의 키는 180cm에 55kg으로 마른 체구였다.

1979년 한국외대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고려대 법대에 편입학했다. 이 과정엔 당시 고려대 문과대를 다니고 있던 부인 송현옥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의 영향이 컸다. 송 교수의 오빠인 송상호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디스크로 학교를 1년 쉰 뒤 오세훈과 같은 반이 되면서 세 사람은 고2 때 함께 과외를 하게 됐다. 과외는 금방 깨졌지만 두 사람은 고3 때 입시학원에서 다시 만났고 이후 고려대에서 유명 커플이 됐다. 오세훈은 아내가 시장에서 국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이 정도라면 이 친구와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가 고시 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의 회장님은 어머니의 이모부였다. 선대 회장이 돌아가신 뒤 그에게 외오촌 당숙이 되는 그 아들이 회장이 됐는데 대학생 때 집안 어른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느 날 집안의 어른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던 중 아버님이 회사에서 손아래 동생뻘인 회장님께 깍듯하게 예를 갖추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할 것 같은 그 말이 당시에는 왜 그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절대로 샐러리맨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는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오세훈, ‘가끔은 변호사도 울고 싶다’, 1995년-
그는 고시생 시절에 하루 14시간 앉아 끈기 있게 공부를 했다. 대학원 1년 때 1차 시험을 붙었고 2차 시험은 같은 해 바로 붙었다. 시간 끌면 패스를 못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

오랫동안 앉아 있던 탓에 엉덩이에 난 종기가 심해져 2시간 넘게 수술을 받기도 했고 지금도 흉터가 남게 됐다. 오세훈은 사법시험에 붙은 직후인 1985년 결혼했다.

연수원을 졸업한 뒤 변호사 생활을 하며 환경 분야에 눈을 떴다. 1993년 인천 부평구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 일조권 문제로 대기업과 소송을 준비한다고 찾아왔다. 일조권에 대한 판례가 없어 스스로 일본 등 해외 판례를 손수 번역해 재판부에 제출했다. 결국 재판부는 대기업에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고 이 사건은 대한민국 최초로 헌법상 일조권을 환경권으로 인정받은 판례가 됐다. 이 과정에서 환경운동연합(당시 공해추방운동연합)을 알게 됐고 시민상담실장과 법률위원장 겸 상임집행위원을 지내며 환경변호사로 활약했다.

“환경운동연합을 갔는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초임 변호사라도 먹고살 만했는데 환경운동연합의 젊은 활동가들이라는 게 대부분 20대인데, 그때 회사원들이 받는 월급의 한 반이나 3분의 1을 활동비라는 명목으로 받고 사실상 자원봉사를 했다. 그런 시민단체 활동을 보고서 ‘이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젊은 시절을 희생하면서 열정적으로 하는구나’ 감동을 해서 그 사람들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하다 보니 운동가들과 친해지게 되고 열심히 돕다 보니 여러 직책을 맡게 됐다.”
- 취재 메모 중 -


● TV 프로그램 진행자로 인기 누리다 정치권 진출
2002년 3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와 오세훈 시장. 동아일보DB
2002년 3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와 오세훈 시장. 동아일보DB
그는 이후 MBC의 법률상담 프로그램인 ‘오변호사, 배변호사’를 진행하면서 인기를 누렸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 각종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도 맡았다. 정장 등 TV 광고모델이 돼 달라는 요청도 들어왔다.

인지도가 높아지자 정치권에서 ‘콜’을 받았다. 그도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현실정치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영입 제안도 받았지만 그는 이회창 총재의 제안을 수용해 한나라당에 입당하며 보수 정치의 길을 선택했다. 기본적으로 국가는 인간의 자율과 동기부여를 중시하는 정책 원리로 운영돼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의하는 보수는 이렇다.

“보수는 ‘물’ 같은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마시는 물 한 잔에 특별한 감흥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수는 겉보기에 대단한 이념이나 이상이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인의 도전과 국가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근본이념인 자유와 경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중략) 보수 우파는 역사의 저류임과 동시에 현실이다. 재미없고 지루하지만 실수가 적어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고 실용적이다.”
- 오세훈, ‘미래’, 2019년 -
반면 진보는 톡 쏘는 시원함과 청량감이 있는 ‘사이다’였다.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기에 가슴 뛰고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실수가 잦고 좌절과 오류가 빈번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입당한 그는 서울 강남을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당 부대변인, 청년위원장, 이회창 대선 후보의 비서실 부실장을 맡는 등 당 초선으로서 비중 있는 역할을 했다. 자신의 관심 및 전문 분야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 소장파로 활동하며 불출마 선언… 정치개혁법안인 ‘오세훈법’ 주도
2004년 1월 오세훈 시장이 불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04년 1월 오세훈 시장이 불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국회의원이 됐지만 그는 지독한 마음고생을 했다. 힘없는 정치 초년생에게 수시로 주어지는 역할이 ‘소총수’ 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 당 소속 국회 부의장의 날치기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해 자택 앞에 동원됐을 때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이던 둘째 딸이 선생님으로부터 “정치인은 모두 쓸어서 한강에 처넣어야 할 족속들”이라는 말을 듣고 제 방에 와서 틀어박혀 울었던 일도 있었다. 딸이 아빠를 창피해한다는 게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후 그는 마음을 다시 먹었다.

“시인 폴 발레리가 말했던 것처럼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절박함이 내게 또 다른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나를 지배하던 가장 큰 생각은, 1인 보스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패거리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1인 보스 중심의 정치가 지역주의의 심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또 그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자금 소요가 정치 부패를 낳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선결과제는 정치자금 시스템의 혁명적 변화라는 확신이 섰다.”
- 오세훈, ‘시프트 : 생각의 프레임을 전환하라’, 2009년 중 -
이에 오세훈은 당내 정풍운동에 앞장섰다. 2003년 소장파였던 남경필 원희룡 의원 등이 함께한 ‘미래연대’ 대표를 맡아 ‘5, 6공 세력 용퇴론’을 주장했다.

이후 2004년 1월 그는 부끄러움과 정치개혁 외침에 대한 책임을 거론하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 개혁을 외쳐도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는 데 좌절했던 그가 “내가 던져야겠구나”라는 생각에 극약처방을 한 것이었다.

“지난 4년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먼저 정치 현실에 정통하지 못하면서 정치를 바꿔보겠다고 덤벼든 무모함이 부끄럽고, 잘못된 길을 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묵인한 무력함이 부끄럽고, 묵인을 넘어서서 어느 사이 동화되어 간 무감각함이 부끄럽고, 미숙한 자기 확신을 진리인 양 착각한 무지함이 부끄럽고, 세계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내심 무시하고 배척한 편협함이 부끄러우며, 그리고 이렇게 부끄러운 자신의 입으로 역사에 공과가 있음을 애써 무시하고 선배들께 감히 용퇴를 요구한 그 용감함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흔들리는 나라를 살리려면 정치를 바로 세워야 하고, 정치를 바꾸려면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바뀌어야 하고, 한나라당을 바꾸려면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는 조급증 때문이었음을 이해하여 주십시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제 자신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조그마한 기득권이라도 이를 버리는 데에서 정치개혁이 시작된다고 주장했던 대로 이제 실행하려 합니다.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 지난번 지구당위원장직 사퇴에 이은 이번 불출마이며, 이것이 정치권의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 2004년 1월 오세훈의 불출마 선언문 중 -
‘불출마 승부수’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오세훈의 지지자 2만여 명은 인터넷을 통해 ‘오세훈을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해 ‘오풍(吳風)을 일으키자’는 캠페인까지 벌이기 시작했다.

또 그는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자금법소위원장을 맡아 기업의 정치자금 기부 금지, 국회의원 1년 후원금 1억5000만 원(선거가 있는 해는 3억 원) 제한, 지구당 폐지 등 법 개정을 주도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가 수백억 원의 대선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었던 덕분이다. 그의 정치개혁법안은 그대로 반영이 됐고 나중에 일명 ‘오세훈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민들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첫 번째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다시 변호사로 돌아갔다. 같은 해 6월 강원 속초시에서 열린 2004설악국제트라이애슬론대회(철인3종경기)에 출전해 이를 완주하며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2004년 6월 28일 자 지면.
동아일보 2004년 6월 28일 자 지면.
휴지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며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온 것이다. 경선 과정에서 그는 홍준표 맹형규 등 후보와 경쟁했지만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당시 그를 향해 “당이 어려울 때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혼자 이미지만 가꾸고 다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 후보로 선출된 그의 선거캠프는 과거 선거캠프와 달리 벽(파티션), 돈, 종이컵 등이 없는 3무(無) 캠프로 주목을 받았다. 캠프 부서 간 경계를 허물어 소통하고, 정치개혁을 앞세운 그의 깨끗한 이미지를 위해 선거비용을 줄이고, 환경보호를 위해 종이컵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열린우리당 강금실 후보 등과 붙어 승리했고 최연소 민선 서울시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 디자인에, 복지에, 환경에 ‘미친’ 시장님
오세훈은 시장으로서 신명 나게 일했다. 디자인, 환경, 복지에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에 선정되며 서울을 ‘디자인 중심도시’로 만들며 브랜드를 업그레이드했다. 서울시청 청사 신축을 과감히 추진했고 노점상 등을 설득해 동대문야구장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변신시켰다. 반포대교 인근 세빛섬과 반포 분수 등 한강 조경도 바꾸며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특히 그는 인생의 전환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는 생각에서 ‘노숙인 희망의 인문학 코스’를 만들었다.

“십 년 전에 인문학 강의로 인생 바뀐 사람이 많다. 얼마 전에 경비원 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10년 전에 그 희망의 인문학 코스를 2년을 들었다더라. 그래서 인생이 달라졌다고 했다. 노숙인들이 중요한 건 알코올중독 때문에 안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교육을 받음으로써 알코올중독을 벗어날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 취재 메모 중 -
이와 함께 그는 창의행정과 여성이 행복한 도시 프로젝트인 일명 ‘여행(女幸) 프로젝트’를 도입해 ‘UN 공공행정상’을 2회 연속 수상했다. 직접 시민인 척 민원실에 전화를 걸어본 뒤 느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다산 120콜센터’로 행정 문의 안내를 통합한 서비스를 정착시켰다. 장기전세주택인 ‘시프트’도 정착시켰다.

오세훈의 업무 스타일에 대한 전직 서울시 공무원의 이야기다.

“꼼꼼하게 직접 챙기고 매일 아침 회의를 통해서 점검하고 또 문제가 있으면 바로바로 해결하려고 한다. 보고를 하면 바로 피드백을 주고 상황 파악과 업무 장악력,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났다. 업무 이해도가 높고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으니 공무원들은 늘 노심초사하고 좌불안석이다. ‘무관용’, ‘노 머시(no mercy)’ 스타일이어서 매몰차게 면전에서 단죄하는 스타일”
- 취재 메모 중 -
2010년 재선에서 성공했지만 2011년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여야는 단계적 무상급식이냐 전면적 무상급식이냐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오세훈이 주민투표로 이를 결정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해 8월 급기야 오세훈은 정치적 생명을 걸고 투표율이 33.3%에 미달하면 시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의사까지 공식 발표했다. 돌파를 위한 승부수였지만 결국 자충수로 돌아왔다. 투표율은 25.7%에 그쳤고 그는 결국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 영국·중국 연수, KOICA 자문단 등으로 활동하며 10년 와신상담
오세훈 시장이 2011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시장직을 걸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뒤 무릎을 꿇고 읍소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오세훈 시장이 2011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시장직을 걸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뒤 무릎을 꿇고 읍소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때부터 오세훈은 혹독한 후반전에 돌입한다. 시장직을 건 결정은 당 지도부의 동의 없이 진행해 당내에선 보수 진영의 궤멸을 자초했다는 책임론이 제기됐다. 그해 10월 치러진 보궐선거에선 서울시장 자리를 박원순 시장에게 내줬다.

그는 이듬해 5월 영국 킹스칼리지 공공정책대학원 연구원 자격으로 유학길에 올라 복지정책에 대해 공부하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넘어가선 어학 공부를 했다. 2012년 12월 대선 직전 귀국했지만 좀처럼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다. 일종의 자숙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와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고문변호사 등을 지내던 그는 2013년 12월부터 2015년 1월까지 한국국제협력단(KOICA) 중·단기 자문단의 일원으로 중남미 페루에서 6개월,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6개월을 보냈다.

수도승같이 지내던 외로운 시간이었다. 그는 매일 혼자 밥을 해 먹었다. 매일 시청에 출근해 배울 게 있으면 배우고 조언할 게 있으면 조언을 했다.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아프리카 등 현지에 있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못 했다.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 골프장은 물론 술집 한 번 가지 않았다. 일기를 쓰며 현지에서 느낀 걸 책으로 출간했다.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르완다에서는 아이들이 맨발로 다니다 거머리에게 물려 결국 발목을 자르는 사례를 보고 신발 보급 활동도 펼쳤다.

오세훈이 사실상 정계에 복귀한 건 2016년 20대 총선이다. 총선을 앞두고 당 지도부로부터 험지 출마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서울 종로 출마를 고집했다. 종로 지역구에서 3선을 했던 박진 현 외교부 장관과 경선 끝에 본선에 진출했지만 민주당 소속 정세균 전 국무총리에게 패배했다. ‘정치 1번지’에서 당선된 뒤 대선 후보로 부상하려는 ‘화려한 복귀’는 실패로 끝났다.

이후 2019년 당 대표 선거에서 황교안 전 대표에게 패배했고 2020년 21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을에 출마했다가 고민정 의원에게 고배를 마셨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할 무렵엔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캠프 대변인을 시킬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광진을 선거에서 떨어지자 ‘재기 불능’에 가까워졌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도 밉거나 섭섭하지 않았고 이해가 됐다고 한다.

그는 2021년 재·보궐 선거 초반 사상 초유의 ‘조건부 불출마’를 선언했다. 안철수 의원이 국민의힘에 입당하면 시장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정치권에선 기이한 행보라는 비판이 나왔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자진 사퇴와 겹치면서 당시 여권 안팎에선 “오세훈도 이제 정치생명 끝난 것 같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난관 끝에 그는 이를 돌파했고 당선됐다. 후반전 10년이 그를 가장 서글프게 한 건 달라진 세상의 인심을 보는 것이었다.

“2021년 선거에서 4위로 출발했을 때 나는 속으로 당선된다는 확신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경선에서 나경원 후보를 이기고 나니까 그때는 이제 일할 사람들이 캠프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안철수 의원과 단일화에 성공하니까 이제 정말 못보던 사람들까지 전부 캠프에 와 가지고 ‘자리를 달라’고 난리 치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 10년은 굉장히 큰 인생 공부가 됐다.”
- 취재 메모 중 -


● 서울시장 5선이냐, 대선 도전이냐…오세훈의 길은?
서울시 제공
서울시 제공
그렇게 오세훈은 10년 만에 다시 서울시장 자리로 돌아왔고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뒤 치러진 2022년 지방선거에서 4선에 성공했다. 그는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시정철학을 통해 안심소득, 안심주택, 서울런(Learn) 등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한강 수상버스 도입, 상암동 하늘공원 대관람차, 서울 고도 제한 완화 등 다양한 정책도 추진 중이다.

그는 10년 동안 끊어진 서울시 정책을 보면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직을 건 것을 많이 후회했다고 한다. 토건(토목건설) 위주 정책을 반대했던 박원순 전 시장 시절 기반시설에 대한 투자가 멈춰 있었고 자신의 재임 시절 추진했던 정책이 중단됐기 때문이었다.

특히 최근 일본 도쿄를 다녀온 뒤 후회를 많이 했다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은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디자인과 기반시설을 준비했고 녹지공간 등 도시계획을 새로 하면서 시민들에게 아름답고 편리하게 공간이 재편된 반면 서울은 멈춰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서울 올림픽 유치를 내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할 말을 잃었다. 이번에 진짜 뼈저리게 내가 지난 10년 동안, 정치를 그만둔 때에도 물론 순간순간 후회하고 반성하고 할 때가 있었지만 이번만큼 내가 절실하게 쇼크를 받은 적이 없어요.”
- 취재 메모 중 -
자신이 추진했던 정책이 중단된 것을 본 그는 2026년 시장 5선 도전과 2027년 대선 출마에 대해 “지금 마음은 반반”이라고 했다. 자신이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시장직을 계속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에서다.

대선 주자로서 그는 여전히 조직과 세력이 약하다거나, 이미지 정치를 한다거나 ‘선당후사’가 아닌 선사후당의 정치를 하며 개인플레이를 해왔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기성 정치인답지 않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과거의 오세훈은 이런 비판을 내심 무시하며 ‘일만 잘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깨끗한 정치가 그의 슬로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한기 10년을 보낸 지금의 오세훈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런 비판을 수용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각각 성공과 실패의 원인이 됐던 그의 승부사적 기질이 어떻게 발휘될지 지켜볼 일이다. 승부처는 결국 서울시정의 성과물이 될 것이다.



오세훈 시장의 핵심 목표인 ‘약자와의 동행’이 오 시장의 ‘웰빙 변호사’ 이미지와 서민적이지 않은 느낌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고 그에게 돌직구를 던졌습니다. 아마 오 시장 삶의 궤적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고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 오히려 동행을 내세우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담긴 비판이지요.

그러자 그는 “정치인의 말이나 이미지를 보지 말고 행적과 발자취를 봐달라”며 “10년 전에도 서울형 그물망 복지를 추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자신이 서울시장 초재선 시절부터 일관되게 복지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 왔다는 겁니다.

오 시장의 책들을 예상보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서울시민인 저 자신도 오 시장이 남긴 성과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만나면서 솔직담백하고 지도자로서의 소신과 일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장전’에선 그의 철학과 진심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있게 전달되길, 멋진 승부를 겨룰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올 1월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황형준의 법정모독> 시리즈는 이번 25화로 끝을 맺습니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이뤄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또 정치가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래서 정치를 혐오의 대상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는 생각과 그래서 각각 정치인들의 매력을 알리고 응원하고 싶었던 필자의 속마음이 담겼습니다. 그동안 애독과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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