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세금 축내는 위원회… 의원들이 만들고 관리안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1일 03시 00분


표심 의식, 영향력 과시하려 남발… 96개는 간판만 걸고 회의 안 열어

국무총리 소속 문화다양성위원회는 근거 법률이 만들어진 지 2년이 다 돼 가지만 아직까지 공식 출범을 못한 채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페이퍼 위원회’다.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이 위원회를 다른 부처 소속의 비슷한 위원회들과 차별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대통령 소속의 문화융성위원회, 국무총리 소속의 다문화가족정책위원회 등 문화다양성위원회와 비슷한 성격의 위원회가 다수 가동 중이다.

문화다양성위원회 설치의 모태는 더불어민주당 윤관석 의원이 2012년 12월 발의한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안’이다. 법안 발의 당시 정부는 새로운 위원회를 만드는 것에 난색을 표했지만, 국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2014년 5월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위원회 설치와 운영에 관한 부담은 전부 문체부가 떠맡게 됐다. 문체부 관계자는 “사회적 공감대를 모으는 과정 없이 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20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통해 2014년 7월 이후 설치된 정부 위원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신설 위원회 33개 중 23개(70%)가 의원입법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다양성위원회, 공인중개사정책심의위원회, 화학물질평가위원회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7월 정부가 공식 발표한 전체 위원회 현황(총 549개)을 바탕으로 이전 1년간의 위원회 활동을 파악하기 위해 2014년 7월을 기준으로 삼았다.

정부가 매년 대대적으로 위원회 정비에 나서고 있지만 국회의원들이 새로운 위원회를 만드는 법안을 남발하면서 전체 위원회 수는 좀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위원회 1개당 연간 평균 3억여 원의 예산이 들어간다. 불필요한 위원회의 신규 설립으로 낭비되는 세금만 수십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사회 문제가 복잡해지면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전문가 의견 수렴의 필요성이 증가하기 때문에 위원회 설치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비슷한 성격의 위원회가 있는데도 의원들이 직능단체의 표심을 의식하거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무리하게 위원회 설치를 법안에 포함시키는 일이 많다는 게 문제다.


▼ 정부가 폐지한 위원회도 의원입법으로 부활 ▼

의원이 위원회 양산

대표적인 게 국토교통부 소속 ‘공인중개사정책심의위원회’이다. 국회 국토교통위원장과 국토위 법안심사소위 소속 의원 전원이 공인중개사법에 서명을 하면서 만들어졌다. 법안 발의부터 통과까지 걸린 시간은 석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국회 안팎에선 의원들이 9만여 명의 회원을 보유한 공인중개사협회의 막강한 영향력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무성했다.

의원들은 일단 위원회를 만드는 데는 결사적이지만 이후 ‘관리는 정부가 할 일’이라며 무책임으로 일관한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지난해 6월 말 현재 549개 정부 위원회 가운데 최근 1년간 단 한 번도 회의를 개최하지 않은 위원회는 96개(17%)에 달한다. ‘개점휴업 위원회’는 대부분 의원입법으로 만들어진 자문위원회다.

공인중개사정책심의위원회의 경우 지난해 단 한 번 회의를 열었을 뿐이다. 그나마 공인중개사 시험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는 데 그쳤다. 공인중개사정책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하겠다는 당초 취지는 무색해진 지 오래다. 국토부 관계자는 “과거 폐지된 공인중개사시험위원회랑 이름만 다를 뿐 하는 일은 똑같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기껏 위원회를 폐지하면 의원입법을 통해 부활하기도 한다. 화학물질 관리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환경부 장관 소속으로 만들어진 화학물질관리위원회는 1년에 회의를 한 번 개최할 정도로 유명무실하게 운영되다 2014년 폐지됐다. 그런데 6개월도 채 안 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환경부 장관 소속으로 ‘화학물질평가위원회’를 설치했다. 두 위원회의 성격은 거의 같다. 정부입법의 경우 행자부가 ‘위원회 사전협의전담관’을 통해 불필요한 위원회 설치를 억제하고 있지만 의원입법에 대해선 구속력이 없어 난립을 방조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의원들의 위원회 설치 입법 남발로 가장 곤혹스러운 곳은 국무총리실이다. 최근 1년간(2014년 7월∼2015년 6월) 신설된 위원회 중 총리 소속 위원회가 5개로 국토부와 함께 가장 많았다. 전체 위원회 549개의 11.8%(65개)가 총리 소속이다. 의원들은 ‘위원회 역할이 각 부처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것인 만큼 총리실에 두는 게 맞다’는 점을 명분으로 든다.

하지만 실상은 ‘격’을 따지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국무총리실이 최근 일부 위원회의 소속을 ‘총리 산하’에서 ‘각 부처 산하’로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했다가 국회에서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총리실 관계자는 “대통령 소속으로 두기에는 청와대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각 부처에 두자니 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총리실로 미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세종=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국회의원#세금#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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