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임명 늦춰 동료 살리는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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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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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 동의안 열흘째 표류… 판결 앞둔 정치인-곽노현 등 직위 유지해 ‘수명’ 연장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임기는 국회가 쥐고 있다?”

국회가 여야 정쟁으로 대법관 후보자 4명의 임명동의안을 제때 처리하지 못한 지 20일로 열흘이 됐다. 대법관 4명이 10일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지만 후임자가 없어 빈방에 사건들만 쌓여 가고 있다.

이 상태라면 수개월째 대법원에 계류 중인 곽 교육감을 비롯한 선출직 공무원과 정치인 관련 사건들도 언제 판결이 나올지 모른다. 이 때문에 정치권과 법조계에선 “이렇게 사법부 공백이 장기화되면 적시에 치러져야 할 재·보궐선거가 줄줄이 미뤄져 ‘사법 공백 도미노 사태’가 나타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율사 출신의 한 재선 의원은 이날 “정치인들의 대법관 임명동의안 처리 지연이 자신과 동료들의 판결을 지체시키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입법부가 그 권한을 자기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이용하고 있는 꼴”이라고 말했다.

일정 수준 이상(선거 범죄는 벌금 100만 원, 일반 형사 범죄는 금고 이상)의 형사처벌을 받은 선출직 공직자들은 그 직을 잃고 몇 개월 내에 재·보궐선거가 치러진다. 따라서 국회가 대법관 임명을 가로막아 사법부를 마비시키면 그만큼 이들의 생명은 연장된다.

실제로 후보자 매수 혐의로 기소돼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의 유죄를 선고받은 곽 교육감의 경우 대법원의 판결 시기에 따라 그 임기가 유동적이다. 공직선거법상 대선 30일 전인 11월 19일 이전에 벌금 100만 원 이상의 확정 판결을 받으면 12월 19일 대통령선거와 함께 서울시교육감 재선거가 치러진다. 그러나 이날을 넘기면 곽 교육감에 대한 최종심이 아무리 빨리 나와도 내년 4월이 돼야 교육감 재선거를 치를 수 있다.
▼ 대법원 사건처리 매일 50건씩 지연 ▼

특히 공직선거법 위반 사범의 상고심 선고는 항소심 판결 후 3개월 이내에 하도록 규정돼 있으나 이 사건은 이미 17일 공직선거법에 규정된 선고시한을 넘겨 버렸다. 사건을 맡은 대법관 중 하나였던 전수안 전 대법관이 이미 퇴임하고 없기 때문이다. 현역 의원인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5만 달러 뇌물수수 의혹 사건은 대법원에 6개월째 계류 중이다. 통합진보당 노회찬 의원의 ‘안기부 X파일’ 관련 명예훼손 사건도 지난해 말 대법원으로 올라간 지 9개월째다.

○ 마비되는 대법원, 생기 찾는 피고인

이미 1심 판결을 받은 무소속 박주선 의원을 비롯해 4·11총선에서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른 의원은 모두 80여 명으로 알려졌다. 법원 내부에서 권장되는 사건 처리 기간은 1심 6개월, 2심과 3심 각각 3개월이지만 법원이 총선 전 선거범죄 전담재판장 회의에서 “1심과 2심 모두 2개월로 단축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상당수 현역 의원도 조만간 대법원으로 가게 된다. 법사위 소속 한 의원은 “대법관 임명동의안을 처리해야 할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신들이 동의한 대법관에게 의원직 상실형을 받을 것”이라며 “임명동의안 처리 지연 때문에 곽 교육감뿐 아니라 본인들도 국회 덕을 크게 보게 생겼다”고 자조했다.

대법관 임명동의안을 둘러싼 여야의 갈등이 길어지자 대법원은 업무 부담이 가중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판례를 바꾸는 주요 사건을 심리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4명이 퇴임한 뒤 업무처리가 중단된 상태다. 대법관 2명이 빠진 대법원 1부는 심리가 사실상 중단됐다. 대법관이 1명씩 빠진 대법원 2, 3부도 심리에 차질을 빚고 있다. 대법원은 현재 매일 50건의 사건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미 500건의 사건을 제때 처리하지 못한 셈이다.

반면 확정 판결이 지연되자 곽 교육감은 올 하반기와 임기 종료 전(2014년 6월)까지의 추진 과제를 세우기 시작했다. 곽 교육감은 최근 내년도 예산안을 짜기 위한 준비도 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서울 교육의 안정성이 흔들린다”며 17일 대법원의 조속한 판결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대법원장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 여야, 임명동의안 처리 갈수록 복잡

그러나 여야가 대법관 임명동의안을 언제 처리할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다. 새누리당은 여전히 김병화 후보자를 비롯해 대법관 후보 4명 모두를 본회의 표결을 부치자고 주장하고 있고 민주통합당은 김 후보자를 제외해야 한다는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저축은행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에 대한 ‘방탄국회’ 논란이 또 하나의 변수로 떠올랐다.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거대 야당이 8월에 방탄국회를 소집하려는 음모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며 “대법관 후보자에 대해 (김 후보자를 빼고) 3명만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8월에 대법관 청문회를 또 열어) 방탄국회를 만드는 것과 연계돼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방탄국회’ 논란 때문에 새누리당이 8월 국회를 열지 않을 방침이라 7월 국회에서 임명동의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사법 공백 사태는 장기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대법관 임명#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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