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과학벨트]과학벨트 산파역들 “정치권 다툼에 누더기 우려” 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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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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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7년 전의 일이다. 2004년 순수한 과학, 예술, 인문학 교수들이 랑콩트르(rencontre·‘만남’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라는 이름의 소그룹을 만들었다. 기초학문을 살려보자는 취지였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는 여기서 태어났다. 세계적인 일류 과학자들이 모이는, 과학과 예술을 결합한 세계적 공간을 만들자는 아이디어의 시작이었다.

최대 규모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현실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임기가 2년여 남은 지금 입지 선정을 둘러싼 지역갈등은 과학계가 애초 꿈꿨던 과학벨트와 거리가 너무 멀어지고 있다.

2004년 처음 아이디어를 낸 민동필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은 “일본 싱가포르 유럽 등에서 과학자 유치 작업을 진행 중”이라면서 “서두르지 않으면 일류 과학자는 해외에 선점당하고 이류 과학자만 올 것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연구를 시작했는데 세월이 너무 아깝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 기초과학계 염원 담은 출발(2005∼2007년)


기초과학계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기초과학을 키우기 위한 여러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거대한 예산의 벽을 넘지 못했다.

기초학문을 살린다는 취지로 2004년 처음 과학비즈니스벨트 아이디어를 낸 민동필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 그는 “처음부터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프로젝트였으니까 다시 초심으로 가야 한다”며 과학비즈니스벨트 용지 선정이 정치권 논쟁으로 번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기초학문을 살린다는 취지로 2004년 처음 과학비즈니스벨트 아이디어를 낸 민동필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 그는 “처음부터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프로젝트였으니까 다시 초심으로 가야 한다”며 과학비즈니스벨트 용지 선정이 정치권 논쟁으로 번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랑콩트르 모임 학자들은 대선주자들에게 차세대 성장동력인 일류 기초과학자들의 허브를 만드는 공약을 제안하기로 했다. 2005년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후보에게 이 공약을 제안했다.

이 후보 측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다. 민 교수는 이 후보를 만나 심각한 인재유출과 이공계 기피 현상을 한 번에 풀 수 있는 정책이라고 설득했다. 이 후보는 허브를 넘어 지식이 산업으로 연계될 수 있도록 과학비즈니스 도시라는 개념으로 확장을 제안했다.

본격적인 공약화 작업이 진행됐다. 랑콩트르 모임도 한국예술종합학교 디자인과 박인석 교수, 성균관대 물리학과 홍승우 교수 등 과학과 예술, 철학, 경영학계 등의 학자 100여 명이 모인 ‘은하도시포럼’으로 확장됐다. 은하도시포럼은 이 후보와 함께 스위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일본 고에너지가속기연구소 등을 방문하며 현실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후보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승리 이후 기존 과학비즈니스도시 공약을 과학 거점도시뿐 아니라 다양한 교육, 금융, 산업 등과 연계되는 벨트 개념으로 또 한 번 확장했다. 홍 교수는 “이 후보가 당선되고 ‘정말 과학비즈니스벨트가 실현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 정치와 엮이면서 표류(2007∼2011년)


은하도시포럼 때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입지 선정이 자칫 지역 간 갈등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있었다. 초기부터 입지선정 기준을 연구해온 성균관대 건축학과 김도년 교수는 “과학연구 시설뿐 아니라 의료, 교육, 문화 인프라를 갖춰 과학자들이 누구나 오고 싶어 하는 ‘집현전’을 만들자는 게 목표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입지 선정은 정치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명박 후보도 “구체적 입지선정은 정치적 이슈이기 때문에 정치가에게 맡겨 달라”고 말했다고 여러 과학자가 전했다. 한 과학자는 “대선 공약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정치인들의 손에 의해 공약이 왔다 갔다 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는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산하에 과학비즈니스벨트 태스크포스(TF)팀이 생겼다. 민 이사장이 팀장을 맡았다. 이 대통령은 TF팀에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불완전하니 과학벨트가 그 치유책이 될 수 있는지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TF팀은 세종시를 포함한 전국 10여 개 도시에 대해 투입되는 예산과 기대효과 등 타당성 검토를 했다. 그러나 “총선을 앞두고 민감한 사안이니 발표하지 말라”는 정치권의 압력 때문에 인수위 백서에 공개하지 못했다.

2009년 과학벨트가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의 대안으로 제시됐지만, 세종시 수정 논란과 맞물려 정치권과 지역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과학벨트도 표류했다. 과학벨트 특별법은 지난해 12월에야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다. 그렇지만 입지 선정을 놓고 여야 간은 물론이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안에서까지 지역갈등이 불거지자 이명박 대통령은 1일 신년 방송좌담회에서 “과학벨트는 (정치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라며 ‘정치의 배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 “과학이 목적이고 입지는 수단”


민 이사장은 과학벨트가 기초과학계의 염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물리, 수학, 화학 등 기초과학학회 17개를 중심으로 과학자 1만 명이 지난해 11월 국회의장, 여야 각 당 대표, 교육과학기술위 소속 의원들에게 특별법 통과를 요청하는 서명서를 제출했다.

민 이사장은 “처음부터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프로젝트였으니까 다시 초심으로 가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입지 선정과 관련한 갈등과 관련해 그는 “정치인들이 결정을 내리겠다고 하지만, 세종시만 해도 정치적으로 풀어내기가 쉽지 않더라. 과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객관적 방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홍 교수도 “과학벨트는 단군 이래 최대의 기초과학 진흥사업이라 할 정도로 중요한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초과학연구원과 중이온가속기 등 핵심시설은 한곳에 모여 있어야 시너지 효과가 난다”면서 “입지는 수단이고 과학과 국가의 발전이 사업의 목적이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치적으로 지역 배려를 앞세워 주요 시설을 각 지역에 나눠주는 식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과학계의 염원에서 출발한 문제를 정치인들이 정치적 문제로 변질시켰다가 다시 ‘과학 문제’로 돌리는 등 혼선을 키우는 바람에 과학벨트는 출산조차 못한 채 누더기가 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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