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세 탈북 국군포로가 南으로 보낸 ‘추석 편지’

동아일보 입력 2010-09-25 03:00수정 2010-09-25 12:45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3월 탈북후 3국서 발묶여… 박선영 의원에 21쪽 편지
제3국의 한 재외공관에서 쓸쓸한 추석을 맞은 국군포로 A 씨. 그는 고향인 경기 광주시로 돌아가려고 3월 탈북을 감행했지만 정부 간 협상이 늦어져 재외공관에 마련된 숙소에서 7개월째 홀로 머물고 있다. 사진 제공 박선영 의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꿈속에서나 생시나 흐느껴 울며 그리워해 온 내 고향산천…. 24세에 생이별하고 고향을 떠나 6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생이별은 참으로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애끓는 눈물 젖은 세월이었습니다.”

올 3월 탈북해 제3국의 한 재외공관에 머물고 있는 국군포로 A 씨(84)에게 이번 추석은 잔인한 명절이었다. 60년간 오매불망 그리던 남녘의 고향땅을 밟기 위해 북한의 가족과 생이별하고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했지만 정부 간 협상이 늦어지면서 제3국에서 7개월째 발이 묶여 홀로 추석을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고혈압과 왼쪽 팔다리 마비로 자리에 누운 채 기약 없는 귀환을 기다리고만 있는 A 씨는 18, 19일 공관을 찾은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에게 “제발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아볼 수 있게 해달라”며 눈물을 쏟으면서 고국의 동포들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건넸다.

24일 동아일보가 전달받은 편지는 “60년 세월 고향 그리움, 내 말로 어찌 표현하겠는가. 내 후대들이 다시는 나와 같은 참극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눈물겨운 60년을 회고한다”로 시작된다. 무려 21쪽에 걸쳐 촘촘하게 써내려간 편지에는 화목한 집안의 귀염둥이로 자라나 국군포로로, 그리고 이제는 탈북자 신세가 돼 홀로 낯선 외국 땅에서 고향을 그리는 한 많은 일생이 구절구절 배어 있다.

주요기사
“유교를 교리로 화목하게 사는 집안에서 그야말로 문중의 귀염둥이로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큰집 작은집 형수님들이 ‘도련님 귀엽다’며 손등을 쓰다듬는 등 어린 시절에 귀여움에 맛들려 살던 추억이 목이 메어 더욱 고향을 그리워하며 60년을 살았습니다.”

1927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A 씨는 1950년 4월 윤모 씨(당시 21세)와 결혼했다. 하지만 곧 6·25전쟁이 터졌고 국군에 자원입대했다. 국군 3군단 3사단 18연대 2대대 6중대 소속으로 1951년 5월 강원 인제군 가리봉(설악산 소재·해발 1519m) 방어전투에 투입됐다.

“5월 18일 밤 12시경 적에 공격을 전초에서 방어하다 적탄에 머리에 심한 부상을 당해 당시 민간인들로 구성된 부상병 운반대 들것에 실려 오던 도중 심한 아픔으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A 씨가 숨진 것으로 여긴 민간인들은 신분증만 챙긴 채 그를 버리고 갔다. 그는 이튿날 인민군에 발견돼 평양 인민군 중앙병원에 후송됐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중립국감독위원회가 포로 귀환을 위해 각 부대를 순회 조사하러 나왔다. 그러나 실제론 대부분의 국군포로들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A 씨는 증언했다.

“모든 포로병들이 (평안남도) 양덕, 맹산의 골짜기로 끌려가 은폐되어 있다가 일이 완화되자 전원 (평양) 순안비행장 건설에 동원되어 일하다, 머리 부상으로 인한 심장신경발작이 일어….”

1954년 황해남도에 정착한 A 씨는 28세 때 다시 결혼했다. 남쪽의 처가 살아 있는지, 아이를 낳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살아야 했다. 하지만 ‘국군포로’란 전력은 끊이지 않고 그와 그의 가족을 괴롭혔다.
▼ 병석에 누운 채 한국 올 날만 기다려 ▼

“1962년부터 농촌건설대에서 일했는데 성분이 좋지 않은 사람을 뽑아 쏘련 벌목공으로 보내는 데 뽑히었는데 머리 부상으로 반신불수라 하여 신체검사에서 떨어졌습니다.”

“맏딸이 인물이 뛰어나게 곱고 생활고등교육을 받아 타에 모범적이어서 보는 사람마다 탐내던 중, 군 안전부 과장이 자기 동생을 추천하며 량편(양편) 합의가 이뤄질 무렵, 과장이 아버지가 의용군 출신이 맞는지 확인하자고 안전부 문건을 뒤져보니 포로병이라, 혼사를 흐지부지 취소하였고, 나는 반감이 일었으나 속수무책 쓴침을 마시었습니다.”

명절이나 생일 때마다 고향을 그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던 중 2008년 중국과 북한의 접경 지역에서 한국에 살고 있는 남동생, 여동생과 재회하게 됐다. 부모와 맏형은 작고하고 큰누나(현재 90세)가 고향에 살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가족들이 1951년 당시 그가 전사했다는 통지서를 받고 그가 숨졌다는 가리봉을 찾아 유골(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유골)을 수습해 묘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막힌 사연도 듣게 됐다.

올 3월 84세 생일날. 인민학교(우리의 초등학교에 해당) 4학년인 손자의 ‘계몽가요’(A 씨의 표현)는 그를 다시금 울렸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로 시작되는 노래에 그는 “저절로 고향생각에 복바쳐(복받쳐)”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아들 며느리 딸 등 온 가족이 “고향에 보내드리는 게 가장 큰 효도인 것 같다”며 함께 울었다. 자식들은 곧 ‘결심’을 실행에 옮겼고 A 씨는 탈북 브로커의 등에 업혀 압록강을 건넜다.

“연락원의 말에 따르면 일주일, 늦어도 한 달이면 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여 믿으며 떠났습니다…. 그런데 (한국) 영사관에 와보니 현실은 딴판이었습니다.”

1953년 정전협정 당시 유엔군사령부가 북한에 억류돼 있을 것으로 추정한 국군포로는 8만2000여 명. 그러나 당시 송환된 국군포로는 8343명으로 10분의 1가량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탈북해 조국으로 생환한 국군포로도 79명에 불과하다. 박선영 의원은 “국군포로는 6·25전쟁 참전용사인 만큼 국민의 인권 차원에서 다뤄야 할 사안”이라며 “우리 정부도 ‘조용한 물밑 외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맹모 탈북자’ 南 관심 호소
▲2010년 7월20일 동아뉴스스테이션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