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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5월 2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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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들 4, 5개월 숙고 결과를 지도부 야합 멋대로 고쳐”
김영선 정무위장 성토에 호응
은행법 개정안은 통과됐지만
금융지주회사법은 부결
4월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지난달 30일 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한나라당이 당론으로 추진했던 금산분리 완화법 2건 가운데 1건이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물밑에서 야당과 협상해 법안을 내놓았는데도 정작 주무 상임위원회의 한나라당 소속 김영선 정무위원장은 여야 의원들에게 부결을 촉구했다. 이 때문에 적잖은 한나라당 의원이 반대표를 던지거나 아예 기권하는 바람에 ‘반쪽’ 법안이 돼 버렸다. 이날 국회와 여당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반쪽으로 쪼개진 ‘당론’
여야 지도부는 이날 오전부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묶여 있던 금산분리 완화법(은행법,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했다. 이 법안은 4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기로 여야가 2월 국회에서 합의까지 한 것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이 틀었다. 원안대로는 통과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 지도부는 관례대로 서로의 체면을 세워주는 선에서 정치적인 타결로 이 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 개정안에서 10%로 돼 있던 기업의 시중은행 지분 소유 한도를 9%로, 20%였던 산업자본의 사모펀드(PEF) 출자 한도를 18%로 낮추는 수정안을 다시 제출키로 한 것이다. 이 같은 타협 후에야 민주당은 “(법안 저지를 위해) 몸으로 막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작년 말부터 이어진 여야 간의 지루한 공방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반란’의 그림자는 국회 본회의장을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오후 11시 45분,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에 대한 수정안이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 외 169명의 발의로 본회의에 상정됐다. 그러나 김영선 정무위원장이 반대토론을 신청하면서 상황은 예기치 않게 돌아갔다. 그는 직전에 은행법 개정안에 대한 수정안을 놓고도 반대 토론에 나섰다. 하지만 여야 지도부가 합의한 개정안이 통과되자 이번에는 금융지주회사법을 부결시키기 위해 재차 나섰다.
김 위원장은 “4, 5개월 동안 해당 상임위에서 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결론을 내린 것을 여야 원내대표들이 마지막 공적을 내기 위해 야합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라면서 여야 지도부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또 “오늘은 여야 원내대표들의 권력에 의해 개별 의원들이 짓밟히는 폭거의 날”이라며 “앞으로 어떻게 개별 의원들의 식견을 믿어달라고 지역구민에게 얘기할 수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민주당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법사위의 월권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상임위에서 정당하게 넘어온 법안을 어떻게 법사위의 일부 의원이 트집 잡아서 다른 의원들의 견해를 짓밟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또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성실한 다수의 견해를 짓밟는 게 과연 민주주의냐”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의원들이 술렁댔다. “옳소!” “김영선 잘한다”는 얘기가 의원석에서 터져 나왔다. 자정 직전 실시된 표결에서 수정안은 재석의원 202명 중 찬성 92명, 반대 64명, 기권 46명으로 결국 부결됐다.
“상임위 결과물을 여야 원내대표가 짓밟아도 되나”
‘카운터 펀치’ 맞은 당론 정치
○ 여당의 반란
법안이 부결되자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수정안을 요구해 합의해 줬는데 이제 와서 반대표를 던질 수 있느냐”며 야당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정작 국회사무처에 확인한 결과 수정안에 반대한 의원 64명과 기권자 46명에는 한나라당 의원이 35명씩 총 70명이 포함돼 있었다. 한나라당 의원 중 찬성자는 76명뿐이었다. 거의 반반으로 당내 의견이 갈린 것이다. 한 당직자는 “금산분리 완화법이 반쪽이 된 게 아니라 당론이 반쪽이 됐다”며 “원내대표끼리 이미 합의한 사안이 여당에 의해 깨진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당론 부결 사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상임위 의견이 묵살된 데 따른 반발은 인정하지만 책임 여당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 수도권 중진 의원은 “지도부의 정치적 결단을 일반 의원이 따라주지 않으면 국정을 이끌 수 있느냐”며 “상임위 이기주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반대·기권 의원 중 상당수가 친박(親朴·친박근혜)계 의원이라는 뒷말도 나왔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당론 정치’라는 구시대적인 패러다임에 반기(反旗)를 든 사례로 꼽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한 초선 의원은 “김 위원장은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초래한다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정당 내 의사 결정의 비민주성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영남권의 재선 의원은 “지도부가 방향을 정하면 소속 의원들이 무조건 따라야 하는 당론 우선주의의 틀을 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례가 소장 의원 모임인 ‘민본21’에서 추진하고 있는 당내 민주화 시도와 결합돼 민주적인 국회 운영 방식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날 회의가 끝난 뒤 김 위원장과 초·재선 의원 5명은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선 “속이 다 시원하다” “지도부가 이런 식으로 해선 안 된다”는 뒷담화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