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위기관리 전문가가 진단한 ‘CEO대통령의 쇠고기 대응’

  • 입력 2008년 6월 7일 02시 57분


[1] 제품 홍보보다 제품 가치를 설득했어야

[2] 리스크 공시 안해 국민불신 키워

[3] 찔끔찔끔 대책으로 점점 코너에

[4] ‘예상문제-맞춤대응’ 매뉴얼 없어

미국산 쇠고기 파문이 확산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위기관리 시스템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오랜 기업 경영에서 체득된 ‘최고경영자(CEO) 리더십’이 문제라는 비판이 많다. 회사의 위기관리 방식을 국가 운영에 적용하려 했으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기업의 위기관리 전문가들마저 이번 대응 방식은 경영학적 오류의 연속이라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쇠고기 협상이라는 상품을 리콜당할 위기에 처한 ‘CEO 이명박’의 패착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자발적인 리스크 공시=LG경제연구원 고재민 책임연구원은 이번 쇠고기 사태의 시작은 리스크(위험 요인) 공시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한다.

4월 18일 한미 쇠고기 협상이 타결됐을 때 정부는 특정위험물질(SRM) 수입에 따른 광우병 노출 정도가 확률적으로 얼마나 높아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내놓지 않은 채 “통제가 가능하다”고만 강변했다. 뒤늦게 “벼락 맞아 죽을 확률보다 낮다” “47억분의 1에 불과하다”는 해명이 나왔지만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너나 드세요”라며 극도의 불신을 보였다.

고 연구원은 “최근 글로벌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자기의 리스크를 공개한다. 리스크를 미리 공시했던 기업은 그러지 않은 회사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주가 변동성이 덜하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아예 연간사업보고서(10-K 보고서)에 리스크 매니지먼트(위기관리) 섹션을 첨부하도록 하고 있다. 세계적인 전자장비 제조업체인 시스코는 10-K 보고서의 3분의 1가량을 리스크 공개에 할애하고 있다. 심지어 P&G는 ‘우리가 나태해질 리스크가 있다’라는 문구를 넣기도 했다.

▽상징적 대응과 실체적 대응=위기 발생 이후의 대처방식도 화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쇠고기 수입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커지자 안전성을 홍보하는 자료를 쏟아냈다. 협상 책임자들과 학계 전문가들을 총동원해 ‘끝장 토론’도 했다.

그럼에도 호응이 없자 마지못해 수입위생조건 장관 고시 연기,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예외규정을 원용한 수입 제한 등의 대책을 찔끔찔끔 내놓으며 점점 코너에 몰렸다.

반면 다국적 제약회사인 존슨앤드존슨은 1982년 미국 시카코의 한 시민이 독극물이 든 타이레놀(진통제)을 복용한 뒤 사망하자 즉각 2억4000만 달러를 들여 3100만 개의 타이레놀 병을 전량 수거해 버렸다. 이를 통해 타이레놀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는 이전보다 커졌다.

청주대 김찬석(광고홍보학) 교수는 “일단 위기가 발생한 뒤에는 해명이나 논리 공방, 이벤트를 통한 ‘상징 대응’을 할 게 아니라 소비자나 투자자가 납득할 만한 실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위기 발생 이후의 쟁점 주도력을 확보하는 데도 실패했다. 쇠고기 사태가 대미 굴욕 외교, 사료금지 강화조치 공표 시점에 대한 정보 부족, 미국 내수용 쇠고기와 한국 수출용 쇠고기에 적용되는 기준 논란 등으로 확산됐지만 파급 경로를 제때 차단하지 못했다.

김 교수는 “씨티은행의 경우 노조에서 파업 기미가 보이면 노조와 언론과의 관계, 감독당국의 반응, 단순 피켓시위에서부터 점거농성까지의 조치 방안, 비(非)노조원의 결합 여부 등 다양한 쟁점을 미리 매뉴얼로 만들어 놓고 선제적으로 대응한다”고 말했다.

▽가치의 설득=마케팅 회사인 KPR 신성인 대표는 제품(쇠고기 협상)을 홍보하기보다는 제품의 가치(쇠고기 협상의 의미)를 설득했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쇠고기 협상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조기 비준이나 대미 관계 개선 등 다양한 정치·경제적 함의가 담겨 있지만 지금은 ‘캠프 데이비드 숙박료’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정부가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 등을 내걸며 협상의 당위성만 강조하다보니 이면의 가치를 이해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분석이다.

국내 껌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일리톨 껌은 1997년 처음 소개됐을 때만 해도 비싼 가격과 떨떠름한 맛 때문에 인기를 끌지 못했다. 껌을 포함한 식료품은 처음 출시된 지 1년 안에 승부가 나지 않으면 훗날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제과업계의 정설.

하지만 2000년부터 마케팅 타깃을 미혼 여성에서 자녀를 둔 주부로 바꾸고 껌 자체보다는 자일리톨 성분이 갖고 있는 충치예방 기능 등을 알리기 시작하자 소비자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홍보 방식도 치과의사 등 소비자가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를 통했고, 자일리톨의 원산지인 핀란드에서 대학교수 등을 초빙해 세미나를 열었다. 이에 따라 출시된 지 3년 뒤부터 매출이 신장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신 대표는 “자일리톨 사례는 제품의 가치를 이해시키면 소비자들의 신뢰가 따라온다는 것과 ‘중고 신인’도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