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녕]통일부의 禁忌語

  • 입력 2007년 10월 1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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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은 옛 소련에서 불기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그 바람을 일으켰다. 그가 1986년 2월 제27차 공산당대회에서 개혁 개방을 천명한 이후 나타난 세계적인 변화는 가위 혁명적이었다. 옛 소련의 해체와 민주화, 동유럽의 공산체제 종식, 동서 냉전의 청산, 독일의 통일…. 그 바람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회주의 국가를 휩쓸다시피 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북쪽만은 아직도 개혁 개방의 무풍지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측이 개성공단 사업을 개혁 개방 차원에서 바라보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방북 후 “개혁 개방은 북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자 통일부가 즉각 반응을 보였다. 홈페이지의 개성공단 사업을 설명하는 자료에서 개혁 개방이란 용어를 삭제한 것이다.

▷통일부의 핵심 업무는 통일정책의 수립 및 집행이다. 남북 간 교류협력과 경제협력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북의 개혁 개방을 유도해 궁극적으로 무리 없이 통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대북 포용정책의 최대 명분이다. 이를 위해 현 정부 들어 올해 8월까지 북에 지원한 돈만도 4조5717억 원이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 합의를 실행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지 모른다. 통일부가 북의 개혁 개방이란 말조차 금기시한다면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북에 국민 혈세를 쏟아 붓는 이유도 설명할 길이 없다.

▷사람의 생각과 말은 행동을 변화시킨다. 1970, 80년대 군사정권이 불러선 안 될 금지곡(禁止曲)과 읽어선 안 될 금서(禁書)를 지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북한을 정상 국가로 거듭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을 앞당기려면, 설혹 북측이 거부감을 나타내더라도 교류 및 지원과 함께 개혁 개방의 당위성을 설파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퍼주기만 하면 북의 변화를 기대하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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