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P 美국무부 출입기자의 ‘6자회담 막전막후’

  • 입력 2007년 9월 5일 03시 00분


6자회담을 이끌어 온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카메라를 등지고 뭔가를 논의하고 있다. 북-미 간 직접대화의 시작으로 평가되는 2005년 7월 9일 베이징 북-미 단독 회동이 끝난 직후인 13일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6자회담을 이끌어 온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카메라를 등지고 뭔가를 논의하고 있다. 북-미 간 직접대화의 시작으로 평가되는 2005년 7월 9일 베이징 북-미 단독 회동이 끝난 직후인 13일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을 이끌어 온 미국 측 견인차는 누구일까. 6자회담 협상 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와 그를 지원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국무부에서 라이스 장관을 밀착 취재해 온 워싱턴포스트 글렌 케슬러 기자의 평가는 이와 다르다. 그는 올해 6자회담 2·13합의가 도출된 과정을 회상하며 “라이스 장관이 (북-미 간) 조율에 실패했지만 힐 차관보의 협상가 기질이 문제를 풀었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내용은 4일 출간된 그의 책 ‘측근(Confidante)’에 실렸다. 다음은 책에 실린 한반도 관련 주요 내용.》

▽힐 차관보의 막후 노력=힐 차관보는 2005년 6자회담 9·19합의 후 평양행을 시도했지만 강경파의 반대에 밀려 좌절됐다. 국면 돌파를 위해 힐 차관보가 낸 회심의 카드는 네오콘 그룹의 후원을 받는 제이 레프코위츠 대북인권특사의 동행 방북이었다.

라이스 장관과 힐 차관보는 그해 3월 평양 방문을 논의했다. 라이스 장관은 “크리스, 당신이 평양에 가게 될 수 있겠지. 그렇지만 북한은 (미국 관리의 평양 방문이라는 정치적 성과를) 공짜로 받을 생각은 말아야지”라고 말했다.

당시 ‘제3자 없는 북-미 간 양자 대화’가 철저히 금지돼 있었지만 힐 차관보는 그해 7월 이 원칙을 어기고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3시간 가까이 독대했다. 중국 관리의 댜오위타이(釣魚臺) 만찬 초대에 두 나라 관리가 응하는 형식이었다.

힐 차관보는 그날 아침 만리장성을 둘러보다가 북한이 “중국이 끼면 안 간다”고 버틴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그는 만찬 초청자인 중국 관리가 불참할 수 있다는 사정을 알았지만 라이스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만찬에 중국 관리는 불참했다.

그날 베이징에 도착한 라이스 장관은 뒤늦게 보고받는 자리에서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나 힐 차관보는 “그래도 김 부상이 6자회담 복귀라는 낭보를 전했다”고 말해 위기를 넘겼다. 당시 한국 정부 당국자는 “누가 먼저 만찬을 요청했는지는 공개할 수 없다”며 함구했다. 케슬러 기자는 “만찬은 힐 차관보가 제안한 것”이라고 전했다.

▽중국의 은근한 북한 거들기=중국은 전체적으로 볼 때 북핵 문제에 적극 개입하지 않는 모양새를 취하며 북한을 거들었다. 힐 차관보가 2005년 3월 중국 정부에 “북한에 공급하는 원유를 끊어 달라”고 요청하자 중국은 “그러면 송유 파이프가 고장난다”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라이스 장관은 그해 1월 인준청문회 때 북한을 “폭정의 거점(Outpost of Tyranny)”으로 표현했다. 케슬러 기자는 이 발언이 ‘멍청한 일’이었다고 단정했다. 한 중국 관리는 “라이스 장관은 이 말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조지폐라는 걸림돌=라이스 장관은 2005년 3, 7월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두 차례 만났다. 그는 이때마다 “북한이 미국 돈을 위조했기 때문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를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후 주석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데 공감했다. 8월 미 법무부가 대만 폭력조직의 북한제 100달러 위폐 밀수 시도를 뉴저지와 캘리포니아에서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하면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지만 그전부터 미국 정부의 북한 압박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힐 차관보는 한국 기자를 만날 때마다 “방코델타아시아(BDA)라는 마카오 은행 이름을 얼핏 들어 봤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줄 몰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케슬러 기자는 “재무부와 법무부가 국무부에 ‘BDA은행이 주 타깃’이란 점을 이에 앞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썼다.

▽부시 대통령의 평화협정 구상=지난해 11월 베트남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미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앞서 그해 4월 워싱턴을 방문한 후 주석과의 오찬 회담에서 이런 생각을 처음 꺼냈다. 당시는 미국 협상가들이 구체적인 정책안을 놓고 토론하던 상황이었다. 후 주석은 이 자리에서 “특사를 평양에 보내 부시 대통령의 돌파구 마련 의지를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중국의 메시지 전달과 무관하게 북한은 미사일 발사(7월)와 핵실험(10월)을 강행했다.

▽미국의 고집=9·19합의 과정에서 미국은 고집스러운 자세를 버리지 않다가 중국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처지가 됐다.

6자회담 대표단이 9월 19일 최종 합의를 도출한 뒤 발표를 앞두고 긴장을 풀 무렵 라이스 장관이 휴대전화로 힐 차관보를 찾았다. 최종 합의문에 쓰인 ‘평화 공존(peaceful coexistence)’이라는 표현이 북한 체제의 인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강경파가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힐 차관보는 중국 측에 문구 수정을 요구했지만 중국은 ‘웃기는 일(ridiculous)’이라며 이를 일축했다.

결국 영문 표현은 ‘평화적으로 공존한다(exist peacefully together)’로 수정됐다. 중국은 “한자로 쓰면 결국 똑같다”며 중국어 발표문의 수정을 거부했다. 한국 일본 러시아도 발표문을 고쳐 쓰지 않았다.

▽로비와 홍보술=케슬러 기자는 힐 차관보가 언론 홍보에 집착한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힐 차관보는 언론 다루기의 귀재인 리처드 홀브룩 전 유엔대사의 문하생답게 언론 접촉을 즐긴 탓에 “언론에 시간을 쓰느라 협상전략을 마련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도 듣는다”는 평을 듣는다는 것.

폴란드 대사였던 힐 차관보가 한국 대사로 부임하기 위해 로비를 벌였다는 것도 기록했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떻게’ 로비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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