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국무부 27년 통역 통 킴씨가 본 6자회담 합의문

  • 입력 2005년 9월 26일 03시 06분


미국 국무부에서 27년 동안 한국어 통역관을 지낸 뒤 최근 퇴임한 통 킴(김동현·사진) 고려대 연구교수가 25일 워싱턴포스트에 특별기고를 했다. 북-미 간 외교협상에 거의 빠짐없이 배석했던 그는 “베이징 합의는 언어의 지뢰밭”이라며 외교적 표현의 행간을 읽는 법을 소개했다. 다음은 기고문 요약.

북핵 6자회담 합의문이 나오기까지 2년이 걸렸지만 그 합의문은 불과 하루 만에 오해와 의혹으로 녹아내렸다. 평양을 17차례나 방문한 나로선 전혀 놀랍지 않다. 외교협상에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많은데 하물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데야 말할 것도 없다.

베이징 합의문은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verifiable) 비핵화를 약속했다. 북한에는 남한 역시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남한으로선 생각지도 않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북한은 핵을 포기(abandon)하기로 약속했다. 한국어로 ‘포기’는 ‘폐기(dismantle)’라기보다는 그대로 남겨두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수로 제공을 논의할) 적절한 때’라는 표현에 동의한 미국의 정확한 의도는 무엇일까. 의심의 여지없이 줄 생각이었다면 ‘이미 과거에(yesterday)’ 줬거나, 아니면 ‘앞으로 결코(never)’ 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북한은 자주 모호한 표현을 고른다. 올 2월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천명하기 전까지 그들이 사용한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이란 용어는 핵 능력(nuclear capability)을 의미했지만 그걸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핵무기 또는 핵기술, 핵물질, 재처리시설을 의미할 수 있다. 더욱이 북한 통역은 ‘억지력’이 아닌 ‘억제력(restraint)’이라고 거듭 잘못 번역했다.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하라는 압력을 받았을 때 북한 관계자는 “우리는 그보다 강력한 무기를 만들 수밖에 없다(bound to produce)”고 했다. 북한 통역은 한국어 ‘만들기로 돼 있다’를 ‘만들 권리가 있다(entitled to)’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실제 의미는 ‘만들 것이다(be going to)’였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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