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최근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과 정몽구(鄭夢九)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을 잇달아 만나면서 청와대와 재계의 관계가 좋아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재계에서는 주요 대기업 총수와의 독대(獨對)에 부정적 반응을 보여 온 노 대통령이 미술관 방문과 자동차 시승이라는 ‘이벤트’를 빌리기는 했지만 총수를 따로 만나는 것에 적잖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현실 경제에서 차지하는 대기업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노 대통령의 기업관 변화=대표적인 대기업 규제정책으로 꼽히는 금융회사 의결권 제한과 출자총액제한제도 유지를 뼈대로 한 공정거래법 개정안 때문에 국회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팽팽하게 맞섰던 지난해 11월.
대통령경제특보인 열린우리당 김혁규(金爀珪) 의원은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을 만나 “경제가 어려운데 재계 총수를 만나 보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지금 만나 봤자 내가 마땅히 줄 선물도 없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김 의원은 “꼭 뭘 안 주시더라도 대통령이 재계 총수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기업들이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불발에 그쳤다.
한 달 뒤인 지난해 12월. 증권집단소송제도 개정 문제 때문에 열린우리당 내의 이른바 실용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논란이 벌어지자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경제분야 참모들과 회의를 가졌다.
찬반 격론을 벌이는 과정에서 윤증현(尹增鉉) 금융감독위원장이 ‘개정 불가피론’을 폈다.
윤 위원장은 “개혁도 좋지만 기업들이 처한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집단소송법 개정이 개혁 후퇴는 아니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노 대통령은 “윤 위원장 얘기가 맞다”면서 개정 쪽에 힘을 실었다. 눈여겨볼 만한 변화였다. 하지만 지난해 말 국회 법사위는 집단소송법을 개정하자는 당-정-청(黨-政-靑) 협의를 뒤집었다. 청와대에선 “대통령 생각도 모르고 열린우리당이 너무한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대통령은 많이 바뀌어 있는데 당에선 아직도 ‘개혁’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재계 총수와의 회동은 노 대통령이 올해 경제에 ‘올인’(다 걸기)하겠다고 한 방침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재계, ‘집권 3년차 훈풍’ 기대=노 대통령은 지난해 여러 차례 외국 순방을 통해 “한국을 먹여 살리는 것은 기업”이라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됐다는 게 주변 참모들의 전언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지난 2년 동안은 대기업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노 대통령이 어떤 방식으로든 재계 총수를 만나는 것은 큰 변화”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여러 번 말하는 것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대기업 총수를 만나면 시장에서 더욱 신뢰감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은 상근부회장을 뽑아 새 지도부 체제가 갖춰지면 노 대통령과 전경련 회장단의 회동도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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