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정상회담]韓 "대화 우선" vs 日 "압력 병행"

  • 입력 2003년 6월 8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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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일정상회담의 최대 현안은 ‘북핵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였다. 두 정상은 총론에서 평화적 해결에는 합의했으나 각론에서는 한국이 대화를 강조한 반면, 일본은 ‘제재나 압박수단도 동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미묘한 차이를 드러냈다. 한국측의 비판을 받고 있는 유사법제 문제는 일본측의 ‘국내용’이라는 설명을 우리측이 이해를 표시하는 선에서 넘어갔다. 과거사 문제는 두 정상 모두 ‘미래’를 강조하면서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다.》

두 정상은 최대 현안인 북핵 문제 해법을 둘러싸고 미묘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냈다. 물론 두 정상은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의 핵무기 보유 및 핵개발 프로그램 불용(不容) △평화적 해결 원칙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방법으로 폐기 등의 기본적인 해결원칙에는 쉽게 합의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접근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정상회담 직후 공동기자회견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외교적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대화와 동시에 압력도 필요하다. 한국 미국 일본 3개국이 강력히 더욱 강력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은 대화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말했다”고 밝혔다.

즉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고이즈미 총리는 ‘대화와 압력 병행’이라는 입장을 내놨으나 노 대통령은 ‘선(先) 대화, 후(後) 압력 검토’ 라는 견해를 보인 셈이다.

물론 고이즈미 총리는 공동기자회견에서 “추가적 조치라는 말이나 압력, 엄정한 대처 등의 표현은 모두 평화적 해결을 도출하기 위한 수단들이다”고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또 우리 정부 관계자들은 고이즈미 총리의 이 같은 설명을 토대로 “실질적으로는 견해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회담에서는 ‘양국이 국제테러, 마약 밀매 등 국가가 개입된 범죄행위 대책에 적극 협력해나간다’고 합의해 눈길을 끌었다.

이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마약, 공작선 등에 대한 차단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운반 및 수출을 막고 마약 밀매와 같은 행위를 차단하기 위한 북한 선박의 차단 봉쇄 등으로 해석된다. 또한 이를 빌미로 한 경제봉쇄조치 가능성도 있다.

물론 노 대통령은 “혹시 마약 단속 등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결부돼 이해되는 경우 압박수단으로 오해될 수 있으므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며 “국제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적극 대처해야 하나 북핵 문제 해결수단과는 구분돼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한편 일본 언론들은 양국 정상이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핵사태를 악화시킬 경우의 조치에 대해 시각차를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북핵 문제와 관련,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의 강경 자세를 감안해 대북 ‘압력’의 필요성을 강조한 반면 노 대통령은 신중한 자세를 표명했다고 전했다.

아사히신문은 한미 정상회담의 ‘추가적 조치’나 미일 정상회담의 ‘보다 강경한 조치’와 같은 직접적인 표현은 한국측의 입장을 고려해 공동성명에서 빠졌다고 전했다.

도쿄=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盧대통령 "과거 언급않기로 작정"▼

두 정상은 양국간 인적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몇 가지 현안을 논의했으나 딱 부러지게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대부분이 ‘조기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선에서 합의를 했기 때문에 결국 후속 실무회담에서 매듭이 지어질 전망이다.

한국인의 일본 비자 면제 문제에 대해 우리측은 ‘양국간 수교 40주년이 되는 2005년부터’로 하자고 구체적인 시한을 제시했으나 일본측이 난색을 표해 ‘조기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선에서 절충이 이뤄졌다. 다만 양측은 수학여행 학생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비자를 면제하고 지난해 월드컵축구대회 기간 중 시행했던 것처럼 일정기간 비자를 면제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합의했다.

김포∼하네다(羽田)공항간 셔틀항공편 운항 문제는 공동성명에는 ‘조기 운항을 추진한다’는 선에서 정리됐으나 실무협상에서는 하루 4회 왕복노선을 두는 쪽으로 의견접근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제는 하네다공항 인근 주민들이 항공노선 증설에 따른 소음 피해를 이유로 반대하고 있는 사실이 걸림돌.

일본측이 연내 협상 착수를 주장해온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역시 ‘조기에 협상을 개시하도록 노력한다’는 애매한 선에서 정리했다.

여기에는 일본과의 무역역조가 여전히 심각한 상황에서 무역역조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큰 FTA 협상을 개시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우리측 주장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결과다.

과거사 문제는 공동성명 전문(前文)에 ‘한일 양국이 과거 역사를 직시하고’라는 포괄적인 표현이 짧게 들어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과거사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이번 방문에서 과거사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한 뒤 과거사의 구체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과거사가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되느냐는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면서 “따라서 과거사 문제는 대통령의 선언에 의해 요구하고 종결짓고 할 문제가 아니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98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방일시 ‘신한일관계 파트너십 선언’을 통해 원칙적으로 과거사 문제는 매듭짓는 쪽으로 정리됐다는 게 우리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은 또 “다시는 그와 같은 과거가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모든 국민이 갖게 됐을 때 과거사는 그냥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가 되풀이되지 않을까라는 의혹과 불신이 국민의 가슴에 살아있는 한 대통령이 뭐라고 선언하든 그 과거사는 살아있고 앞으로도 되살아나고 또 다른 불행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사에 대한 면책 문제는 앞으로 일본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취지였다.

노 대통령은 8일 재일동포 간담회에서는 “이번에 과거사와 유사법제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과거사 문제가 끝났다거나 마무리된 것은 물론 아니다. 모든 걱정이 없어졌다는 뜻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도쿄=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日유사법제' 공동성명엔 포함안돼▼

6일 노무현 대통령의 일본 도착 직전 일본 참의원에서 통과된 유사법제 문제는 공동성명에서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7일 오전 두 정상간의 단독회담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먼저 일본 정부의 입장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자위대가 해외에서 침략행위를 할 가능성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면서 “한국 언론이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걱정하는 보도를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한국 내의 비판 여론을 진화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또 “유사법제는 지난 수십 년간 지켜온 전수(專守) 방위의 틀 내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방위력 보유는 모든 나라가 국가로서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한다”면서 “그러나 일본의 방위정책 변화에 대해 주변국가 국민들이 경계심을 갖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노 대통령은 또 기자회견에서 “중요한 것은 유사법제가 된다, 안 된다가 아니라 그 법을 운용하고 있는 국가와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믿음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면서 “일본이 동북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지지하고 주도해가는 평화주도세력으로 주변국가에 인식될 때 유사법제 문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노 대통령을 수행중인 참모들은 ‘노 대통령의 대응이 미온적이지 않느냐’는 취재단의 지적에 대해 “이번 일본 방문은 북핵 문제 해결의 시급성 때문에 이뤄졌다. 돌발적인 사안 때문에 핵심 현안을 망칠 수는 없다”며 “외교 관례상 이 정도의 우려 표시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도쿄=김정훈기자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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