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최정호/2005년이 어떤 해인데…

입력 2003-06-08 18:20수정 2009-10-1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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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광복 50주년을 1년여 앞둔 어느 날 청와대 오찬에 초대받는 영광을 누린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당시 대통령이 우의(友誼)를 자랑하던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 함께 내년 태평양전쟁 종전 50년을 기념해, 과거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과 피해를 본 아시아 각국의 정상회담을 중국의 난징(南京)쯤에서 개최토록 이니셔티브를 취해 보시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해 봤다. “그랬다간 일본과 영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 당시 대통령의 즉각적 반응이었다.

▼國恥 100주년에 韓日 축제? ▼

그러나 아시아 정상들의 ‘난징 퍼레이드’란 나의 창의적 발상은 아니다. 이미 1994년 유럽에서 2차대전 승리에 결정적 계기가 된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 여왕부터 미국 프랑스의 대통령까지 과거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의 화를 입은 10여 개 국 정상들이 붉은 카펫도 깔리지 않은 노르망디 해변의 맨 모래밭에서 퍼레이드를 펼친 전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랬어도 영국 미국 프랑스 어느 나라도 독일과 ‘영 원수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처럼 과거를 기억하고 역사를 제대로 챙기는 이웃을 독일은 더욱 존중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난징 퍼레이드’는 나의 백일몽으로 끝났고, 실제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994년 일본은 그 많은 도시들을 젖혀두고 하필이면 히로시마(!)에서 아시아경기대회를 개최했다. 탈(脫)역사적, 몰(沒)역사적 경향의 아시아 젊은이들에게 마치 일본이 지난 대전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것처럼 선전할 수 있는 더할 나위없는 자리를 골라서(그러나 한국과 중국을 포함해 아시아경기대회를 보이콧한 나라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일본과 영 원수가 될까 우려했던 것일까)….

광복 후 첫 세대임을 자부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國賓)방문했다. 현충일에, 그것도 일본 참의원에서 유사법제 3개 법안이 통과되는 날에 국내의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방일해서 일왕의 영접을 받았다. 그 노 대통령을, 아시아 우방 각국의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꼬박꼬박 참배하는 고이즈미 총리가 “용기 있는 결단”을 하셨다고 공동 기자회견에서 칭찬했다. 만일 올 여름에도 일본 총리가 국외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야스쿠니에 가서 제 나라 전몰군인들의 제(祭)를 올린다면 그를 이번에는 제 나라 전몰군인들의 젯날에 국내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방일하고 돌아온 대통령이 “용기 있는 결단”을 하셨다고 칭찬의 보답을 하지 않기만을 나는 혼자서 간절히 빌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걱정스러운 일이 생겼다. 정상회담 후 발표된 공동성명을 보니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해 2005년을 ‘Korea Japan Festa 2005’로 정하고 각종 사업을 공동 개최해 젊은이들을 비롯한 국민 각계각층의 상호 이해와 우정을 증진시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잔치 좋아하고 굿거리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행사업자나 이벤트업자들은 벌써 입에 군침이 돌지 모른다. 그러나 국교 정상화 10주년도 50주년도 아닌, 하필이면 40주년에 무슨 대축제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도 도대체 2005년이 우리에게 어떤 해인데?

2005년은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기 위해 강제로 ‘보호조약’을 체결한 을사국치(乙巳國恥·1905년)의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것도 당시 고종 황제와 일부 대신들이 서명에 반대하자 궁궐에 들어온 일본군이 외부대신(外部大臣)의 직인을 빼앗아 날인한 불법적 조약이다. 이를 보고 민영환 등 수많은 충신들이 자결했고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이 날에 목을 놓고 통곡한다)이란 명사설을 써서 온 국민과 함께 울었다.

▼‘국교40년’에 묻혀버려서야 ▼

그리고 2005년은 을유(乙酉)년이 환갑을 맞는 해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을유년이 무언지 잘 알지 못하나 우리 세대에게 을유년이란 1945년, 곧 ‘광복’의 동의어였다.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에게 2005년은 을사국치조약의 100주년이요, 을유 광복의 환갑이 되는 해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 선행되어야지, 국교정상화 40주년 잔치치레로 더 중요한 겨레의 역사를 덧칠해서는 안 된다.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로 패전 50주년을 덧칠했듯이.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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